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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핵분산형 도시 모습을 보이는 1894년의 부산항. 일본인과 중국인 거주지 등이 표시돼 있다. 사진출처=한수당연구원 |
- 개항 후 서구인 시선 대부분
- 日 거주지·조선 초가집 비교
- 19세기 말 프랑스 여행가
- 유럽인·토착주민 마을도 구분
- 다양한 민족 변화 모색 시기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딘 파란 눈의 서양인은 지금부터 약 220년 전인 1797년 10월 15일 정오 무렵 입항한 87t급 영국 해군 탐사선 프로비던스호의 승무원이었다. 이들은 북태평양해역을 탐사 항해하면서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우연히 용당포에 입항하게 되어 이곳에서 부식과 땔감을 구하는 등 바쁘게 10여 일을 보내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1876년, 부산항은 개항되었으나 서구인의 뚜렷한 발자취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883년 세관이 문을 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들의 발길이 잦아지게 된다. 부산해관의 고용해관원이나 선교사, 그리고 여행자들이 하나둘 미지의 조선-부산을 찾아든다. 그 가운데는 영국 외교관 칼스(W.R.Carles)가 있다. 그는 1883년 11월부터 1885년 6월에 걸쳐 조선을 여행하고서 1889년 '코리아에서의 생활'이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에 부산을 '2개의 부산'으로 구분하여 소개했다.
그는 "부산은 순전히 일본인의 도시가 됐고, 거기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은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사는 집은 초라하고 일본인들이 사는 집은 매력적이다"고 하면서 왜색풍이 넘쳐나는 일본인 전관거류지역과 본토 조선인이 사는 초량 북쪽의 누추한 초가 마을을 비교하였다. 이렇게 부산을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례는 그 후 부산을 찾은 많은 서양인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1883년 조선사절단을 미국에 안내했던 미국 과학자 로웰, 1884년의 앨런, 1885년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와 같은 미국 선교사도 조선으로 오면서 부산에 첫발을 딛고는 이와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특히, 1894년 2월 63세의 나이로 우리나라를 찾은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예리한 눈으로 부산을 바라보고 미래를 점쳤다. 그녀는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일본 우선 소속의 증기선 히고마루(日向丸)를 타고 15시간이나 걸려서 쓰시마를 거쳐 부산항에 입항했다. 그런데 부산에 닻을 내리고 만나게 되는 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첫눈에 왜색도시(倭色都市)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 당시 부산에는 5508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8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 어부가 건너올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일본인 전관거류지역은 깨끗하고 아름다웠지만, 조선인이 사는 마을은 좁은 거리를 두고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채워져 있어 비참해 보였다고 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마주친 한국인의 인상은 참신했으며,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닮지도 않았고 체격이 크고 훨씬 잘 생겼다고 했다. 마치 오늘날 한류열풍을 일으킬 수 있는 민족임을 예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부산은 얼지 않는 항구로서 서울-부산 철도가 놓이면 상업의 중요한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부산을 4개의 도시로 세분해서 본 서양인은 프랑스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였다. 그는 1888~1889년에 최초로 한반도를 횡단한 여행가로서 유명한데, 그의 저서 '조선종단기'에서는 부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도시는 네 개의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으며, 네 개의 부산이 한데 모여 있다"고 하면서 네 곳 가운데 첫 번째로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전관거류지'를 꼽았다. 그다음은 전통적인 양반문화마을인 '동래'였으며, 세 번째는 주로 해관직원이나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복병산과 영선산 부근의 유럽인 거주지'였고, 마지막으로 들먹인 곳이 토착 주민의 해변마을인 자성대 주변 부산포였다. 여기에 지금의 초량동에 자리했던 청국조계지까지 포함하면 부산에는 다섯 개의 도시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9세기 말 개항장 부산항에는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세력이 자리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