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인 1943년 준공
- 광석·컨테이너선 오간 물류기지
북항재개발사업은 부산항의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북항의 기존 재래부두기능까지 바꿔 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빠르게 다가선 곳이 부산항 제4부두가 아닌가 싶다. 화물을 장치하던 곳이 이제는 국제여객터미널로 바뀌어 상전벽해의 현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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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두는 오륙도에서 직항으로 입항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부산항 중심부두였다. 개발하기 직전인 2009년 8월의 3·4부두 전경 |
부산항 제4부두가 탄생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이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부두축조에만 급급한 나머지 창고시설 하나 없이 완공했다. 그야말로 부두 전체가 하나의 널따란 야적장이었다. 이러한 부두 특성을 제대로 살려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였다. 당시만 해도 이 땅에 첨단 수출상품이란 게 있었던가. 국토의 살점이라 할 수 있는 대리석, 고량토, 활석, 중석 등 광석류가 주요 수출품이었다. 이 수출용 광석류를 선적하기에는 4부두가 제격이었다. 날로 광석류 전용부두로서 명성이 쌓여갈수록 부두야적장에는 숱한 광석이 경쟁하듯 산처럼 솟아올랐다. 그러나 본래 부두가 매축지인 까닭에 지반이 약해 부두 곳곳에서 균열과 요철현상이 나타나 이대로 가다가는 침하될 우려마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대안이 광석화물의 야적높이를 2m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제4부두는 1970년 이후 부산항의 변혁기를 맞아 가장 잘 버텨준 부두이기도 했다. 부산항에 최초로 컨테이너선이 들어온 것은 1970년 3월 2일이다. 미국의 시랜드사 소속의 1만t급 피츠버그(Pittsburgh)호가 35피트 컨테이너 98개를 싣고 제4부두에 접안했다. 태평양을 건너온 컨테이너화물의 첫선은 앞으로 물류운송의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한 것이어서 정부와 화주 그리고 노조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컨테이너화물은 날로 인기리에 일본 등지에서 피더선에 실려 부산항을 드나들게 되었다. 1972년 초에는 민자로 된 전천후 작업공간인 창고 네 동이 지어지면서 4부두는 더욱 컨테이너전용부두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74년께는 컨테이너 피더선이 월 40~50항차에 100회가 넘는 하역작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당시 한일항로에는 국적선 6척, 외국국적 4척 등 10척의 피더선이 오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 이곳 야적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하던 광산물은 더욱 입지가 좁아지면서 급기야 1979년 10월에 가서는 아예 집을 비워주어야만 했다. 철광석·중석·아연광 등은 마산항 제1부두로 가고, 고철·무연탄·백운석·고령토·납석 등은 부산항 제7부두에서 처리되도록 조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4부두는 1978년 자성대컨테이너터미널이 완공되기 전 과도기에 정부조달물품을 비롯한 일반화물과 컨테이너화물이 동시에 처리된 대표적인 물류기지였다.
6·25전쟁 당시 최후의 낙동강방어선까지 내려온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비밀리에 펼쳐진 경북 영덕의 장사상륙작전에 뛰어든 애국열에 불탄 학도유격대원 772명이 탄 LST문산호가 출항한 곳도 이곳 제4부두였다. 전기사정이 녹록치 못하던 1960년대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에 전력 공급을 위해 미국에서 도입한 발전함 레지스탄스호가 접안해 한국전력부두발전소로 오랫동안 불을 밝힌 곳도 역시 4부두였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