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부 갈등 탓 ‘반역자’로 찍혀와
- 푸틴 정적·배신자 잇단 의문사
- 서방 “프리고진 예외 아냐” 추측

두 달 전 무장반란을 시도하다 무위에 그쳤던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62)이 23일(현지시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잇단 정적·배신자 제거 움직임 속에 프리고진은 철군 당시 약속된 신변 안전을 끝내 보장받지 못한 것으로 관측된다.

2010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푸틴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프리고진(왼쪽). AP 연합뉴스

이날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러시아 재난당국은 텔레그램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엠브라에르 레가시 제트기가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 추락했다. 초기 조사 결과 승무원 3명을 포함해 탑승한 10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항공당국은 “프리고진과 드미트리 우트킨이 해당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발표했다. 우트킨은 프리고진의 최측근이다. 친바그너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도 프리고진이 이번 사고로 숨졌다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군 방공망이 바그너그룹의 전용기를 격추했다며 단순 사고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일부 현지 매체도 이륙 후 30분도 안돼 해당 비행기가 방공망에 요격됐다고 보도했다.

프리고진의 전용기는 이륙 직후 이상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다가 순식간에 추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항공기 경로를 추적하는 웹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의 이언 페체니크는 “오후 6시19분 비행기가 갑자기 수직 하향했다. 30초도 되지 않아 운항고도 8.5㎞에서 2.4㎞를 내리꽂았다”고 말했다. 해당 비행기는 30여 초에 걸쳐 수㎞씩 상승·하강을 거듭하다가 떨어졌다. 로이터통신은 프리고진 일행이 비행기 탑승 전 모스크바에서 국방부와 회의를 가졌다고 전했다.

프리고진은 1990년 출소 뒤 러시아 각지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리였던 푸틴 대통령과 친분을 쌓았다. 이후 크렘린궁의 각종 만찬과 연회를 도맡으며 ‘푸틴의 요리사’로 불렸던 그는 대통령과의 막강한 친분을 바탕으로 2014년 바그너그룹을 창설,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 분쟁지역에서 러시아 정부를 대신해 개입하며 이권을 챙겨 왔다. 바그너그룹은 민간인 학살 등 잔학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참전해 격전지인 바흐무트 점령을 주도하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 군부와 갈등이 커졌고 지난 6월 23, 24일 러시아 군 수뇌부 처벌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켜 푸틴과 척을 졌다.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서남부 로스토프주 군시설을 장악한 뒤 모스크바로 진격했고, 모스크바에서 200㎞ 내 거리까지 진입했지만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반란 하루 만에 철군했다.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을 “반역자”로 지칭하면서도 벨라루스로 가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무장반란 닷새 뒤 푸틴과 면담하는 등 화해 분위기도 포착됐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서방은 프리고진의 이번 죽음에 푸틴 대통령이 연루됐다고 추측한다. 푸틴은 그간 정적과 배신자를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해왔기 때문이다. 신변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반역자”로 찍혀 프리고진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푸틴 대통령이 배후로 의심되는 사건으로 2006년 6월 ‘홍차 독살’이 대표적이다.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한 호텔에서 전 동료가 전해준 홍차를 마시고 숨졌는데, 찻잔에는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방사성 물질인 폴로늄이 발견돼 러시아 당국 연루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같은 해 10월 러시아군의 체첸 주민 학살을 고발했던 언론인 출신 야권 지도자였던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자택으로 가는 아파트 계단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2015년 보리스 넴초프 전 총리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지난해 9월엔 우크라이나 전쟁에 비판적 입장이었던 러시아 최대 민영 석유업체인 ‘루크오일’ 라빌 마가노프 회장이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추락사하는 등 ‘푸틴 정적’들의 의문사는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