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니 도서출판 강수걸(가운데) 대표가 직원들과 편집회의를 하고 있다. 서순룡 기자 seosy@kookje.co.kr

지금부터 꼭 2년전인 지난 2005년 2월 15일 부산에 새 출판사가 하나 나타났다. 산지니 도서출판(대표 강수걸·40·www.sanzinibook.com). '야생에서 오랜 해 동안 자란 매. 높이 날고 오래 버틴다.' 이 출판사가 내세운 산지니라는 순우리말의 뜻이다.

산지니는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주력으로 하는 '종합·기획 출판사'임을 표방했다. 출판계의 전쟁터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다. 거기에 독자 필자 정보 자금 두뇌 열정이 쏠려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종합·기획 출판사라고?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저 매가 과연 얼마나 높이 날 것이며 또 얼마나 오래 버틸까.

창립된 그 해 10월, 산지니가 첫 작품들인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김대갑 지음)과 '반송사람들'(고창권 지음)을 시장에 내놨을 때도 이런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그 사이, 대표를 포함해 직원 4명의 작은 지역 출판사의 행보는 큰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산지니는 지금까지 모두 19종의 책을 펴냈다. 국내 저자의 책이 11종, 번역서가 8종. 대중서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 16종이고, 학술서는 3종이다. 거의 한달에 한 권 꼴이다. 준비 중인 신간들도 몇권 대기 중이다. 모든 책은 출판사가 책의 주제를 정하고 저자 또는 번역자를 물색해 책을 만들고 마케팅까지 맡는 기획출판이다.

책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최근 펴낸 '내가 만난 인도인'은 19년 째 인도에 살면서 네루대를 거쳐 현재 델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도영 교수가 쓴 책이다.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실용·실질적인 내용을 강조한 이 책은 인도 관련 국내 기업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 제의도 받아놓은 상태다.

번역서 '팔루자 리포트'는 레이건 정부의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를 지낸 저자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쓴 전쟁 다큐멘터리. 소설가 조갑상(경성대 국문과) 교수가 쓴 '이야기를 걷다'는 한국 문학 작품 속에 녹아 있는 부산의 현장들을 돌아보고 쓴 문학에세이이며 조진만 전 국제신문 전문기자가 집필한 '부자도시로 가는 길'은 지난 해 11월 발간 후 3쇄에 들어갔다. 진보적 관점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번역서 '아메리칸 히로시마'의 저자는 미군 정보장교 출신이자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CEO'로 뽑혔던 보수파 공화당원이었다.

산지니의 이 같은 행보는 그간 부산에서 보기 힘들었던 광경이다. 의욕과 저력을 갖춘 부산의 출판사들이 그동안 나름대로 지역출판계를 굳건히 지켜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 영역은 문학출판 중심이었다(딸린 기사 참조). 산지니와 같은 전면적인 기획·종합 출판사의 등장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수걸 산지니 대표는 "부산에 있기 때문에 불리한 점은 있지만 그것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성격의 기획출판을 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는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산지니는 기획부터 책 디자인, 필름 출력까지 모두 부산에서 완결하고 책의 인쇄와 제작은 경기도 파주출판단지를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국의 큰 서점들과는 직거래하고, 대규모 서적 총판을 통해 다른 지역에 책을 배급하기 때문에 전국에 책을 까는 데도 큰 문제는 없다.

"관건은 끊임없는 기획의 능력과 다품종 소량 출판을 통해 꾸준히 시장에 좋은 책을 내놓는 데 있다"고 강 대표는 밝혔다. 그는 이것을 "3등의 전략"이라고 지칭했다. 매출액 1000억 원을 노리는 1등 규모 출판사에게는 1등의 전략이 있고, 2등에게는 2등에 맞는 전략이 있으며, 지역에 있는 산지니에는 산지니만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8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지역출판사 경영에 뛰어들면서 '적어도 100건의 기획안이 준비돼 있어야 기획출판사를 운영할 수 있다'는 원칙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원칙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내부 기획회의를 열고 전문가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인터넷과 신문을 통한 국내외 정보 검색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초창기에 부산 경남에 관한 책을 기획하려고 덤볐는데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는 것을 깨닫고 지역신문을 꼼꼼히 보기 시작했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체계적인 기획에 바탕한 '다품종 소량 출판'을 통한 리스크 관리도 산지니의 필수 전략이다. 산지니는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초판 발행량을 1000부 선으로 낮췄다. 많아도 2000부를 넘지 않는다. 인도 전문서적인 '암소와 갠지즈'(김경학 이광수 지음)는 초판을 단 500부만 찍어 거의 소화했다. 서울의 출판사들이 초판에서는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재판부터 수익을 노린다지만, "이 곳은 초판부터 이익을 내야 하고 재고의 부담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대표는 "책을 꾸준히 내자 주위에서 '산지니가 돈을 많이 벌었다'든가 '인세를 많이 준다'는 식의 풍문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며 "우리는 의미 있는 책들을 펴내면서 꾸준히 작은 행보로 걷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출판인협회 회원사에 주어지는 여러 혜택을 활용해 지금까지 싼 비용으로 국제도서전에 10여 차례 산지니의 책을 출품하는 등 정보 수집과 '부산의 책'의 해외 수출 가능성까지 타진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강 대표는 "아직 성과를 논하기에는 이르다. 지역사회에 관한 책을 꾸준히 펴내 지역문화 발전, 문화의 지역화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은 산지니의 확고한 원칙이다"라며 "그러나 그 방향은 기존 지역출판과 겹치지 않는 차별화 전략 속에서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패를 논하기는 분명 이르지만 산지니가 지역출판의 하늘 위로 날아오른 '야생 매'인 것은 확실하다.

산지니 도서출판이 창립 이후 2년동안 발간한 책 19권.

# 지역 출판사 독자 곁으로 한발 더
- 문학 중심 탈피, 동화 · 청소년 잡지 등 발간… 문화사업도 펼쳐

부산에는 현재 문학을 중심 분야로 하는 지역출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출판 시장을 형성하고 지탱해왔다. 지역문화의 성장에 이들 출판사들은 크게 공헌했다. 산지니 도서출판이 비교적 짧은 기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지역 출판사들의 활약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최근 기존의 지역출판사들 사이에서도 활력과 변화가 느껴지고 있다. 1989년 설립된 도서출판 해성은 지역 문학 발전과 궤를 같이 해왔다. 해성은 최근 어린이 출판 부문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지난 해 5월 시작한 어린이 창작동화 시리즈인 '여럿이문고'가 비중 있는 동화작가 배익천 손수자 김문홍 최영희 씨 등을 저자로 4권째 접어들었다. 지난 해에는 청소년잡지 '푸른글터'도 창간했다. 해성 시선도 상반기 중 재개한다는 계획이다. 해성은 부설 부산문화연구회를 통해 어린이독서경제체험학교, 독서논술교실, 무작정 떠나는 문학기행 등 다양한 문화사업에 연인원 약 1만명을 참가시키는 등 적극적인 문화향유층, 독자층 발굴에도 주력하고 있다.

부산 지역 문학 출판의 강자로 활약해 온 도서출판 전망의 저력도 여전하다. 1991년 창립된 전망은 지금까지 400종이 넘는 책을 펴냈으며 부산의 문학 출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다. 부산의 문예계간지 '신생'을 모태로 지난 2003년 시작한 출판사 신생은 지금까지 신생 시선 14권, 신생 비평선 3권 등 비중 있는 부산 지역 문학인들의 작품 발표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2003년 출범한 작가마을은 문학 부문을 중심으로 기획출판의 비중을 더욱 높이기 위해 채비가 한창이다. 지금까지 시인선 9권과 비평선 3권을 기획출판 형태로 선보였고 동화 출간, 자서전 성격의 시리즈 출간 등 영역을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최근 최휘웅 시인의 평론집을 펴낸 도서출판 말도 꾸준하다.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 지역출판사들의 활약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지난 몇해전과 비교하면 부산의 책들의 출간 통로가 다양해지고 책의 질과 만듦새도 개선되는 등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