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인은 말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서정주의 '자화상' 중).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영화다. 봐도 봐도 아직 목마르다'고.

최근 부산 해운대의 한 바닷가 건물(시네마테크 부산)은 속칭 '아줌마'들의 수다로 오후 내내 들썩였다. 남편이나 시댁 이야기 등 '그저 그런 수다'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폭력의 피카소라 불리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부터 마틴 스코시즈의 '성난 황소'를 거쳐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까지, 수 십년을 넘나드는 영화사들이 탁구 공 튀듯 좌중을 날아다녔다.

이들이 바로 영화에 대한 열정과 영화도시 부산에 대한 사랑이 가득찬 중년 관객들이다. 영화 전공자보다도 더 열심히 보고, 좋은 영화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는 그들은 임영진(63) 김묘숙(55) 권자향(46) 이기선(45) (이상 주부) 씨와 이지영(27·대학원생), 손경환(34·학원강사) 씨 등 여섯 명의 영화광들.(시네마테크 홍보담당 안영수 씨도 함께 했다) 자, 지금부터 귀를 쫑긋 세우시라. 평범한 이웃집 아줌마가 '무림의 고수'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난상 영화토크는 형식에 구애됨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언제부터 영화와 인연을 맺었나.

▲이기선="어떤 영화도 나쁜 영화는 없다"는 게 제 지론이에요. 영화수업을 들으면서 영화 '광'이 됐고요.(이때 옆에 있던 권자향 씨가 "집에서 완전 내놨어요"라고 거든다) 시네마테크는 물론이고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를 다 봐요. 그것도 첫 날, 첫 회로요. 가족 인간관계 등을 제외하면 내 삶의 '우선 순위'가 영화보기랍니다.

▲권자향=영화는 음악 그림 문학 사진 건축 등 제가 좋아하는 모든 분야를 한 데 녹여 근사하게 만드는 '판타지'예요. 첫 사랑은 2004년 '월드시네마 Ⅰ'이었죠.('월드시네마전'은 매년 3월 중순부터 한달 간 개최하는 영화기획전. 올해 4회. 감독 장르를 떠나 동서양 유명 영화가 15~20편 가량 상영함) 얼마 전 프랑스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봤는데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 음악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더군요. '돌아버릴' 정도로 좋았어요.

▲김묘숙=전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은 50대 주부예요.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끝나면 '마법에 걸린 듯' 이곳으로 오게 돼요. 작년 초부터 시작됐구요.(모두들 "증세가 같다"며 손뼉을 치고 웃는다. 김묘숙 씨는 매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시네마테크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나이가 들면서 외려 더 성마르고 피곤해질 때가 많았어요.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오롯이 영화에만 몰두할 수 있어 마음이 편안해져요.(김 씨의 수첩에는 보고싶은, 그리고 봐야 할 영화 목록 600~700여 편이 빼곡히 적혀 있다)

▲임영진='호호호'.(그는 말도 꺼내기 전에 웃음부터 날린다. 가장 나이가 많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나이가 젊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43년생인데 나이는 49세에 멈췄어요. 지난해 4월부터 지금까지 모두 116편을 봤어요.(정확히 기억하는 숫자에 모두들 입이 '쩌~억' 벌어진다) 영화 티켓도 다 모아서 간직해요. 영화는 '너무 순수'해서 좋아요. 하루에 4편까지 봐요.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새벽 2시에 집에 갈때도 있고(집이 부산역 인근이다), 하루 4시간만 자고 영화를 보러 다니기도 해요.

▲이지영=돌아온 백조로 귀향한 뒤 시네마테크를 만났어요. 가격이 저렴(일반 4000원, 회원 3000원)해서 하루종일 살았죠. 지난해 샘 페킨파(미국) 감독의 '와일드 번치'를 보고 망치로 한 대 맞는 기분이었어요. '영화가 이렇게 재밌구나'를 처음 알았고, 끝내 '질렀죠'. 비싼 값을 치르고 VIP회원(회비 50만 원)이 됐지만 3배 정도 본전을 뽑았어요. (여기저기서 "잘 했어, 화끈한 선택이야. 근데, 왜 여태껏 그런 게 있는 지 몰랐지"라며 아쉬워했다)

-영화가 왜 좋은가

▲이기선=영화가 시작하기 전 불꺼진 몇 초 동안 온 몸에 전율이 일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기 전의 가슴떨림이랄까? 풀 한 포기, 하늘의 구름 한 조각만이라도 영화에 나왔던 장면을 기억할 수 있다면 행복해요. 얼마 전에는 영화를 보다가 호흡곤란증을 겪었어요. 부정맥이라던가. 그래도 응급처치만하고 다음날 또 극장에 갔어요.(갑자기 임영진 씨가 끼어든다. "기자님, 저 눈빛 좀 보세요. 얼마나 사랑하면 저런 들뜬 표정이 될까요?")

▲임영진=어떨 때는 서울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어디서 자야 하지"라고 걱정하는 소리를 들어요. 영화가 있는 부산에서, 그것도 바다와 요트가 한 눈에 펼쳐지는 그림같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죠.



오후 3시에 시작한 '토크'는 두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말한다. 자신들은 부산을 사랑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주부들이라고. 영화로 꿈꾸기 시작하면서 인생의 또다른 보석을 갖게 됐단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아직도 '낯선'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를 즐기는 이웃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 영화가 상영되기까지

- 기획·작품선정~극장 개봉

- 많게는 10단계 거치기도

예술영화를 만나기까지는 기나긴 '여정'이 필요하다. 보통 시네마테크 부산의 프로그램 기획 및 수급은 '기획상영'과 '일반상영' 두 가지도 나뉜다. 가장 복잡한 것이 기획상영으로 보통 10단계를 거친다. 준비기간도 6개월에서 1년이다.

우선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프로그래머가 '필름 누아르 컬렉션' 기획전을 계획하고 상영작을 선정했다고 치자. 이때 예정작은 본 상영작보다 3, 4편 정도 많이 선정한다. 필름 프린트 섭외 과정에서 상영료, 프린트 상태, 저작권자 분쟁 등으로 인해 상영이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저작권자를 수배한다. 무엇보다 저작권자의 허가가 없으면 상영이 안 된다. 저작권자도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워너 브라더스, 유니버셜 스튜디오 등 할리우드의 거대 스튜디오인 경우와 소규모 독립 영화사, 마지막으로 개인이 소유한 경우 등이다. 이 외에도 감독과 제작사가 공동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 편집 버전에 따라 저작권자가 다른 경우 등 다양하다. 저작권자를 찾는데 성공하면 상영료(회당 얼마)를 협의해 지불한다.

저작권자가 상영을 허가하면 필름 프린트(상영용 원본 필름)를 찾아야 한다. 이는 저작권자가 프린트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저작권자가 상영을 허가했다고 할지라도 프린트를 찾지 못해 상영을 포기할 때도 많다.

프린트를 찾고 나면 프린트 대여료를 지불하고 수입 절차를 거친다. 영상물은 통관이 꼭 필요한데 관세 면제를 받기 위한 몇 가지 절차가 있다. 상영이 결정되면 자막 제작과 홍보 등을 위해 프리뷰 테이프와 대본, 그리고 스틸사진 등의 자료를 저작권자로부터 공급받는데 오래된 영화는 없을 때도 많다. 이런 경우는 인터넷 또는 다른 배급사 등에 '수배령'을 내린다. 자료가 수급되면 자막 담당자가 자막과 번역 작업을 실시하고(2시간짜리는 2, 3일에 한편 정도다), 프로그램 자료 및 홍보물을 제작한다. 이후 프린트 검색과 만일에 대비한 증거자료(사진촬영)를 남기고 자막 수정을 통해 마침내 상영관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