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서 연출가는 쉽게 비유해 영화에서 감독과 같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연출가의 손을 거치느냐에 따라 작품의 맛이 달라진다. 물론 배우의 역할이 커지만 배우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은 바로 연출가다. 올해 부산연극제(16일까지) 경연에 참가한 9개 작품 연출가들을 만나 '나의 연출 포인트와 고민'을 들어봤다. (극단명·작품명)


#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추적에 초점

- 김 만 중 (극단 사계·장미를 삼키다)

헝클어진 머리, 덥수룩한 수염, 푹 꺼진 눈. 첫 공연을 마치고 만난 그는 한마디로 '까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연극제 공연 날까지도 '쓰리잡'을 뛰고 있었다. 아동극, 뮤지컬 연습, 연극제 준비. 그 날도 밤을 샜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김만중 연출가의 이번 나들이는 오랜만이다. 2004년부터는 극장 운영하느라 바빴고, 창작극을 찾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 이번에 내건 작품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심리극이다. "이번 작품은 연극 '양파' 작가의 작품인데 처음 봤을 때부터 '골치 좀 썩겠구나' 싶었어요. 인물들의 과거 행적을 추적해 이들의 현재를 더듬어가는데 초점을 두려고 했는데, 시민회관 소극장은 오랜만이라 영 어색하네요."


# '무대뽀' 정신으로 뮤지컬로 도전장

- 최 재 민 (극단 에저또·미자르)

그가 일을 냈다. 부산연극제 사상 처음으로 뮤지컬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일단 해보자는 '무대뽀 정신'이 그를 뮤지컬로 이끌었다. 연극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꼭 뮤지컬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극작도 직접 했다. 지난해 받은 혹평으로 극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지인의 충고를 듣고 마음을 고쳐 먹었단다. 그래서 이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을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과감한 시도를 한 터라 수상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극제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상에 집착도 많이 했죠. 하지만 어차피 부산에서 계속 일할건데 한 번의 수상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더라구요. 이번에는 신나게 만들어 보자는 생각밖에 없어요."


# 진부한 소재 야구중계 섞어 차별화

- 이 동 희 (극단 자유바다·어머니)

이 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였다. 1999년 연극 '난난'에서 주인공역으로 출연하는 등 부산연극제에도 지금까지 배우로 참가해왔다. 하지만 어느 한구석에서 극작과 연출에 대한 욕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이번에 드디어 분출됐다.

그는 이번 작품을 '진부한 소재'라고 소개했다. 그의 말처럼 어머니의 애환은 연극이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던 것이 사실. 그런데 거기에다 자기가 평소 좋아하는 야구 중계를 얹어 차별화를 꾀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이 주인공인 아들로 출연도 한다. 1인 3역인 셈이다. "뭐든지 처음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욕먹지는 않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목표요? 물론 대상 수상이죠, 하하."


# 한국적 연희 양식 무대위에 펼쳤죠

- 심 문 섭 (부산연극제작소 동녘·신부, 나비 꿈꾸다)

그는 요즘 '한국적인 것' '축제성'에 빠져 있다. 이제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바리데기'에 이어 이번에도 한국적 연희 양식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려고 하는 것. 시골 마을의 장승도 등장하고, 장자의 '나비의 꿈'도 빌려 왔다. "지난해 록 뮤지컬 '가락국기'를 하면서 축제성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통과의례 중 결혼이 가장 축제 같잖아요. 세상의 모든 신부가 결혼을 꿈꾸지만 실제 닥치면 불안해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그는 수상도 좋지만, 이 작품이 동녘을 오래도록 먹여살릴 레퍼토리가 되었으면 하고 내심 바란다. 그는 "전국연극제에 나가게 되면 다른 지역에도 알릴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 8년 만의 연출 새로운 의욕이 불끈

- 김 인 덕 (극단 하늘개인날·13월)

"실은 이번이 8년만에 연출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하니까 새롭게 의욕도 생기고, 앞으로도 꾸준히 연출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의 주 종목은 무대미술이다. 연출가로 부산연극제에 참가하는 것도 처음이다.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으나 연출 경력은 짧은 셈이다.

보통 '13월'이라면 미래지향적, 혹은 말세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들의 13월은 심산유곡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정지된 시간을 의미한다. 격리된 사람들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무게중심을 뒀다고. 지금은 무리없이 연습을 하고 있지만 원래 캐스팅 했던 배우들이 스케줄이 안맞아 대폭 물갈이 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 동래야류까지 차용 욕심좀 냈어요

- 이 기 원 (부산레파토리시스템·삼매경)

그가 이번에 맡은 작품의 소재는 원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른 한 팀도 원효를 소재로 한 연극을 들고 나왔다. 공연 전부터 두 작품이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효스님의 삶과 그의 무애행은 내 평생의 관심사였습니다. 당시 승려들은 당나라에만 갔다 오면 대접받았고 타락해갔는데 원효는 당 유학을 포기 했잖아요. 그때부터 무애행은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불교를 백성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 원효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연출가는 연극에서 종교적 색채를 과감히 덜어냈다. 대신 동래야류의 할미과장을 넣었다. 음악도 6명의 악사가 만들어낸다. 그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말하면서 "너무 욕심을 부렸나"하면서 웃었다.


# 원효대사 인간적인 모습 표출 역점

- 정 순 지 (극단 액터스·환화여 환화여)

이벤트 연출, 무대기술 등을 맡다 오랜만에 정극 연출에 뛰어 들었다. 그런데 작품을 구할 수가 없었다. 마감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고민했다. 그러다 하루 밤을 새면서 몇 권의 희곡집을 읽다 무릎을 쳤다.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찾은 것이다. 섭외가 문제였다. 전체 20명이 필요했지만 처음엔 3명이 연습을 시작했을 정도다. 3명이 일당백으로 뛴 덕에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됐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가 들고나온 작품도 원효가 주인공. 하지만 그는 "우리는 원효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공연 전에는 절에 올라가 삭발식도 했다고. "배우들 중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도 있지만 삭발식이나 배역에 대한 불만은 없었어요."


# 마당극 가미 사도세자 죽음 재조명

- 이 정 남 (극단 맥·광대유사)

극단 맥은 부산연극제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종 연극제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거창국제연극제, 고마나루 향토 연극제(충남 공주)에서 단체 은상, 여자연기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부산연극제와는 인연이 없었다.

이번에 그는 유일하게 시대극을 내걸었다. 대본도 직접 썼다. '사도세자가 어떻게, 왜 죽었을까'라는 의문이 자꾸 들어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됐다고. 연극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암살 당했다는 가정에서 시작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바라본다. 마당놀이극을 주로 하는 극단이다보니 시대극에다 마당놀이 요소를 끼워 넣었다.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 연극제 끝나도 소극장서 계속 공연

- 오 정 국 (극연구집단 시나위·얼굴없는 피카소)

연출가 수상 경력으로만 본다면 그는 단연 선두를 달린다. 2004에는 '인류 최초의 키스'로, 2005년에는 'BC 2430'으로 잇따라 부산연극제 연출상의 영예를 안았다.

"처음에는 지난해 했던 작품을 조금 손봐서 올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작가와 계속 고치다보니 내용이 많이 바뀌었네요." 정신병원이었던 배경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바뀌었고, 배우들의 배역도 손질했다.

경연작 중 마지막 팀이라 아직 여유가 있겠다 싶었다. 그러자 "안그래도 긴장을 좀 해야 하는데 배우들도, 나도 긴장이 덜된다"며 "하지만 이번에는 연극제 끝나고도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