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기반으로 대안출판 프로젝트인 '한페이지 단편소설' 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서진 씨. 그의 곁에 있는 책들은 지금까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종이책으로 출간된 한페이지 단편소설 작품들. 곽재훈 기자 kwakjh@kookje.co.kr

# 시작은 재미 삼아… 미약하게…

시작은 미약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출신으로,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는 문화무가지 '보일라' 편집장이던 서진(32·현 공동 발행인) 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개인 홈페이지에 '한 페이지 단편소설 모집'이라는 공고를 냈다. 2003년 4월이었다.

"부산대 전자공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에 다니고 있던 1998년부터 저는 '해피레터'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짠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1만 명쯤 되던 회원들에게 좋은 시나 좋은 소설 문장을 보내주는 사이트였습니다. 사실 이게 유명한 '고도원의 아침편지'처럼 좋은 글을 독자에게 서비스하는 여느 사이트보다 시작이 빨랐어요. '해피레터'가 고도원의 아침편지 원조 격 아닌가요?(웃음)" 부산 남구 대연동 경성대 앞 '보일라' 사무실에서 만난 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서 씨는 "원래 다른 공대생들처럼 소설에 대해 잘 몰랐다"고 털어놨다. "소설? 그게 효용이 뭐지? 남들이 쓴 이야기일 뿐이잖아." 공대 대학원생 서진은 한때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을 타고났던가 보다. "어느 순간, 소설이 재미있어졌습니다. 그러다 직접 소설을 써보면 더 재밌겠다 싶었죠. '한페이지 단편소설 모집' 공고를 홈페이지에 올리던 당시에는 이미 제 첫 소설을 쓰고 있었죠."

'재미있겠다' 싶어 '한단설'(한 페이지 단편소설) 공고를 내긴 했지만, 막상 아무도 응모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는 양치기 소년이 되기로 작정했다. "공고를 내면서 '응모작이 100편을 채우면 이걸 책으로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나눠드리겠다'고 덜컥 약속한 거죠. 책을 어떻게 내는지도 몰랐고 별달리 대책을 마련해놓지도 않고…." 그런데 뜻밖에 호응이 빠르고 뜨거웠다. 응모작이 50편을 넘어가자 걱정이 슬슬 됐다. 작품이 더 불어나자 '아!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 책을 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일하던 '보일라'의 도움을 받아 첫 작품집 '한 페이지 단편소설 100'을 펴냈다. 그 때가 2004년 4월.

그렇게 우연히 시작한 '한단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현재 홈페이지(www.1pagestory.com) 회원 수는 4182명, 단편소설 6730편이 응모됐고 이 가운데 소정의 절차를 거쳐 444편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작품집 형식의 종이책을 8권 출간했고 전자책(e-book)을 17종 펴냈다. 재정을 지원하는 서포터스가 54명 생겼으며 사회복지시설과 학교 군부대 등에 61권을 기증했다. '한단설'은 최근 출판사로 정식 등록했고 서진 씨는 '미래형 비영리 대안출판 프로젝트'로 '한단설'을 가꾸기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모든 것을 정비하고 전력투구하고 있다.


# 다양한 '한단설' 프로젝트들

서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에디터로서 한 페이지 단편소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단행했다. 홈페이지를 뜯어고쳤고 '한단설'을 개인 출판사로 등록했으며 각종 프로젝트들을 확정했다. 현재 '한단설'은 홈페이지를 통해 응모작을 받아 이에 대한 회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서 씨가 에디터로서 당선작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이 당선작들을 100편씩 모아 1년에 한번 꼴로 책으로 엮는데 지금까지 4권이 나왔다. 응모작 가운데 8분의 1 정도가 당선작으로 뽑히는 비율이다.

"처음에는 당선자 중에 30대 직장인과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어요. 중고등학생들의 참여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죠. 하지만 당선작들은 이른바 '귀여니'류의 가벼운 인터넷 소설과 달라요.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협물과도 다르고요." 진지하면서도 실험적인 성격의 작품이 당선작의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 서 씨의 설명이다.

지난해에는 당선작들 중 인기작들을 골라 '한페이지 단편소설 베스트 2006'을 냈고, 당선자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해서 타계한 가수 김광석의 노래가사를 테마 삼아 쓴 신작들을 모은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이라는 선집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66프로젝트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 5월 66프로젝트의 첫 책이 나왔다. 이 프로젝트는 특정한 테마를 정해 '한단설' 출신 작가들이 이에 대한 작품 66편을 써내면 이를 66만원의 출판 비용 안에서 책으로 엮어내는 방식이다. 지난해 5월 나온 첫 66프로젝트의 주장은 러브 스토리였고 이달에 나올 두번째 책의 주제는 초능력이다. 이와 비슷한 99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서 씨는 "66프로젝트는 서포터들의 후원과 편집진의 엄정한 관리로 책을 만들고 있는데 앞으로 '한단설'의 중심을 연1회 내는 당선작품집에서 66프로젝트로 옮길 것"이라며 "이를 위해 현재 무크지 형태인 66프로젝트를 정기간행물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 가지 '한단설'이 힘을 쏟고 있는 부문은 전자책 출판. "현재 전자책은 당선자들의 신작을 모으거나 정해진 테마에 맞는 작품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17권을 냈는데 앞으로 매주 3권 정도씩 나올 것이다. 상반기 중에 50권, 올해 안에 100권의 전자책을 내는 것이 목표"라고 서 씨는 밝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한단설'이 이토록 많이 펴내는 책들은 오프라인 서점에는 없다는 점이다. "전자책은 정식 출판등록을 거쳐 무료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고 나머지 책들은 온라인에서 주문자들에게 판매하거나 서포터스와 사회복지 기관 등에 증정합니다. 초판은 300여 부를 찍는데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소화합니다." 서 씨는 "우선 일반 출판사와 같은 방식으로 종이책을 찍어내면 단가를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단설'의 책들이 대안출판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일반 오프라인 서점에는 공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단설'이 꿈꾸는 대안출판 프로젝트란 뭘까.


# 미래형 대안출판의 꿈

서 씨는 "문학책을 출간하는 기존의 종이책 출판과 현재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는 인터넷소설 사이에 '한단설'이 파고들어갈 틈새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단설'의 작품들은 '귀여니'류와 무협물이 주류인 인터넷 문학과 달리 진지한 시선과 실험정신에 중점을 두는데, 그렇다 해도 기존의 정통 문학에 비하면 가볍고 신세대적인 형태이다. 인터넷을 애용하는 젊은이들 중에 이 같은 문학을 좋아하는 층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한단설'이 순항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한단설'은 이 계층을 노려 '독자가 작가가 되고 작가가 독자가 되는' 참여형 문학운동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인구 자체도 늘어날 것이란 판단도 있다.

책을 내고 작가가 되는 과정에 가로놓인, 너무 높은 장벽을 낮추겠다는 기획이다. 이와 관련해 작가가 원고를 주면 이를 주문받아 외양과 내용이 모두 뛰어난 책으로 소량만 제작해주는 프린트 온 디멘드(POD)에도 서 씨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험판 POD책이 상반기 중에 나올 예정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안출판의 길을 모색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서 씨는 모든 관련 프로젝트를 비영리로 진행하고 있다.

"'한단설'을 통해 더 많은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탄생하고 이들이 문학 향유의 주인으로 등장한다면 우리 사회의 문화도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공대를 나와 문학에서 미래를 찾고 있는 서 씨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 문화무가지 '보일라' 경성대 앞에 새 둥지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는 유명한 문화무가지 '보일라'(공동발행인 강선제 서진)가 12년 정든 부산대 앞을 떠나 최근 부산 남구 대연동 경성대 앞 동일스위트 오피스텔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강선제 발행인은 "이전 사무실이 너무 크고 관리가 어려워 경성대 앞으로 이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부산의 대표적인 대학가이자 또 하나의 문화중심지인 경성대·부경대 앞에서 '보일라'가 새 출발한 것은 지난 2월 1일.

강 발행인은 "그간 잡지 '보일라'에 대해 서울쪽 문화인들의 호응이 더 높아져 부산-서울 배포 비중이 4:6 정도로 바뀌었다"며 "앞으로 새 보금자리에서 더 좋은 잡지를 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보일라'는 지난 2002년 부산에서 창간된 문화무가지로 톡톡 튀는 기획과 예쁜 디자인으로 부산 서울 등지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cafe.naver.com/voila (051)621-3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