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경성대·부경대 지하철역에서 열린 부산국제연극제 쇼케이스에서 극단 시에트르 정모둠의 'LOVE 죽여? 살려' 출연 배우가 극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송이 기자

지난 5일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개막식을 신호탄으로 11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간 2007부산국제연극제(BIPAF)의 열기가 뜨겁다. 공연장 길거리 지하철역 등 부산시내 곳곳에서 펼쳐지는 세계 연극의 향연, 그 막전막후 열기의 현장으로 들어가봤다.


#5월 5일 오후 6시 30분 부산문화회관

솔직히 말하겠다. BIPAF 개막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 몰랐다. 더구나 빗방울까지 떨어지는 잔뜩 지푸린 날씨였는데 말이다. "팀장님, 입석 때릴까요?" 그렇다. 입석을 고민해야 할 만큼 이날은 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불이 꺼지고 개막식 시작. 사회를 맡은 배우 조재현이 등장하자 객석의 반응이 열광적이다. 내빈 소개에 이어 무대에는 올해부터 BIPAF조직위원장도 겸하게 된 허남식 부산시장이 올랐다. 어라,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식에서 자꾸 부산국제영화제 타령이다. 관객들의 표정에서도 황당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허 시장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급기야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2007부산국제영화제를 개막합니다!'


#5월 7일 낮 12시 30분 부산예술대학

지난 5일 오후 6시30분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식. 어린이 풍물단이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며칠째 계속되는 지푸린 날씨로 첫 주말을 차분하게 보낸 BIPAF. 본격적인 시작은 이제부터다! 화창하다 못해 덥기까지 했던 이날 부산예술대학의 한 강의동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로 꾸며지는 10분 연극제 예선이 열리고 있었다. 총 16팀이 10장 있는 본선 티켓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데, 이 날 세 팀이 예선을 치른 것.

첫 번째 주자는 부산시 여성문화회관 결혼이민자들의 모임인 '우리는 하나'. 몽골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온 8명의 결혼이민자들은 여성문화회관에서 한국 문화 수업을 듣는 이들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연습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개미 목소리 밖에 안나온다. '어, 조금 더 크게 해야 좋은 점수 받을텐데…'. 보는 이가 더 가슴 졸인다.

다음엔 동구노인복지관 연극동아리인 '효자손'팀. 적어도 60대는 돼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팀이었지만 무대 위에서는 날쌘 제비다. 이들은 집안 내에서 구박받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짧은 시간안에 완결성 있게 녹여냈다. 짝짝짝.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연기가 수준급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아쉬운 것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너무 많이 버벅댔어." "연습한 것 만큼 못해서 속상해." 객석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은 한참 동안이나 자신들의 연기를 '타박'했다.

두 팀의 연기가 끝날 즈음 맞은 편 강의실에서도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유명 연출가 메소드 워크샵(method workshop)이 한창인 이 강의실에서는 한국의 채윤일 연출가가 다섯 명의 수강생과 함께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워크샵 이틀째인 이날은 연출가가 미리 준비해 온 단군신화 대본으로 연습을 해보는 날이다. 낯선 대본을 받아든 수강생들이 버벅거리자 연출가의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든다. "환인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야." "곰은 미련한 동물이 아니거든. 춘향이 처럼 연기를 해야돼." 강의실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5월 7일 오후 8시 경성대 콘서트홀

이 날은 인기 비보이팀인 라스트포원의 공연 '스핀오딧세이'가 열리는 날. 이미 오후 5시 콘서트홀 앞에서 쇼케이스를 벌여 열광의 도가니를 만든 터라 공연장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1시간30분 남짓한 열광적인 공연이 끝나고 공연보다 더 기다려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 라스트포원이 무대 끝에 오밀조밀 모여 앉자 질문공세가 시작됐다.

두 아이를 둔 주부가 "아이들이 춤을 배우고 싶어해서 같이 왔는데 위험하지 않냐"며 아줌마다운(?) 질문을 던지자, "우리 팀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지만 일본 미국에는 40대에도 춤을 즐기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다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춤도 많다"고 답변.

외국인들도 질세라 앞다퉈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춤을 췄어요?" "몸 관리는 어떻게 한 거예요?" 아하, '궁금한 점은 국적을 넘어 다 똑같구나' 싶다. 이어 묵직한 질문도 날아든다. "외국에서는 비보이들이 아티스트 대접을 받는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기다렸던 질문이라며 반색하고 대답한다. "외국의 비보이들은 어릴 때부터 춤을 생활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 비보이들이 조명받는 것은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두배씩 더 노력해 순식간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힙합하면 딴따라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따뜻한 시선으로 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비보이들도 그들대로의 고민이 있음을 알게 됐다.


#5월 7일 밤 10시 경성대 앞 키노아이

지난 7일 낮 12시30분부터 부산예술대학 한 강의실에서 열린 10분 연극제 예선에서 동구노인복지관 노인동아리인 '효자손'팀이 연기를 하고 있다.

늦은 밤. 연극인 교류의 장인 BIPAF 사랑방이 차려진 경성대 앞 키노아이로 향했다. 아담한 크기의 바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원봉사자, 연극배우와 연극제 관계자들이 뒤섞여 술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 자유로움과 젊음이 느껴졌다. 밤 10시30분이 되자 작은 무대에서는 라이브 공연이 시작됐다. 동주대 실용음악과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와우! 놀라운 실력에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한 무리에서 외국인을 발견했다. 메소드 워크샵에 강사로 참여한 러시아 연출가 디미트리 아리유핀이었다. 그는 "다른 연극제에도 이런 공간이 마련되는데 여기에는 특히 공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진다"며 "젊은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하니 즐겁고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자정이 넘도록 자리를 지켰다.


#5월 8일 오후 3시 경성대·부경대 지하철역

올해 부산국제연극제가 야심차게 준비한 부대행사인 쇼케이스 다섯 번째 무대가 마련된 날. 오후 2시30분부터 얼굴에 분칠을 한 해프닝 팀이 바람몰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행인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자고 졸라대기도 하고, 텀블링을 하면서 시선끌기에 여념이 없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자 이날 공연팀인 시에트르 정모둠의 'LOVE, 죽여? 살려!'팀이 등장. 어수선한데다 조명도 없는 맨바닥에서 정말 열심이다. 그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10명에 불과하던 관객이 어느새 3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쇼케이스를 지켜본 최정애(29·경성대4) 씨는 "연극제 한다는 것만 알았지 관심은 없었는데, 쇼케이스를 보니까 보러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쇼케이스, 성공이다!

#5월 8일 오후 8시 남천동 액터스 소극장

KBS부산홀이 현철 콘서트를 보러나온 관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맞은 편에 자리잡은 액터스 소극장에는 낮에 쇼케이스에 나섰던 'LOVE, 죽여? 살려!'공연이 마련됐다. 작은 소극장은 금세 관객들로 가득 들어찼고, 늦게 온 사람들은 자리를 못잡아 우왕좌왕했다.

공연이 끝난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중년 여자 관객은 "결혼한지 20년이 됐는데 사랑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해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연극제는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부산을 연극 속으로 흠뻑 젖어들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