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엔 판소리를 듣는 쟁쟁한 귀명창이 많소. 이 사람들이 초년병 소리꾼의 소리를 다 듣고 나서 '저 소리에는 그늘이 없어' 한마디 하면 그걸로 그 소리꾼은 끝이여! 그늘이 뭐냐? 신산고초다. 신산고초가 판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미학적 기교이고…" 김지하 시인이 강연이나 책에서 '흰그늘'을 설명하며 종종 했던 말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흰그늘이라는 미학의 개념이었겠으되, 듣는 사람의 상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것을 뉘라 막으랴. 이 말을 접한 순간 덜커덕 낚이고 말았던 것은 '귀명창'이라는 저 낯설고도 참한 낱말 때문. 소리를 즐기고, 분별하는 식견이 있으며, 여차하면 쓰다 달다 논평까지 내놨으니 요즘 말로 하면 이들이 바로 비평가렷다!

그렇다고 소리 실력 모자란다고 초년병 소리꾼 하나 창졸간에 매장시킬 수 있었던 귀명창의 '문화권력'을 예서 논하고자 함은 아닌 바에, 그저 그리운 것은 예술을 애호하고, 잘 하는 예술인 북돋우고 못하는 이 꼬집으며, 자신의 높은 심미안을 대중과 나눠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이 시대의 비평가, 이 땅의 비평문화이더라.

우리 지역의 공연예술 비평가들, 연극·춤의 평론문화는 어디로 간 것일까.


●평론의 실종→담론의 쇠락

부산의 한 연극평론가에게 비평의 구실을 물었다. "연극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춰야 한다. 비평은 둘 사이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한 춤이론가에게서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 서서 춤작품을 대중에게 연결시켜주는 일이 제일 크고, 창작자에게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되먹임(피드백)으로써 춤 장르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행위'를 중심에 놓고 볼 때, 공연예술(performing arts)은 연극과 춤 장르로 한정할 수 있다. 주로 무대에서 이뤄지기는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음악은 독립된 분과이자 거대한 장르로 따로 서 있다. 부산국제연극제의 영문 명칭을 'Busan International Performing Arts Festival'로 쓰는 이유다.

그런데 현재 부산 공연예술계는 그럭저럭 제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이다가도 비평이라는 영역 앞에 서면 그만 브레이크가 턱 걸리고 만다. 부산의 공연예술 비평은 실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신문에도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대중이 소통할 수 있는 곳에 잠입·침투해 있는 공연예술비평은 찾기 힘들다.

"부산연극협회가 내는 '부산연극', 예총 부산지회의 '예술부산', 부산민예총의 '함께 가는 예술인', 부산문화회관이 발행하는 '예술에의 초대'가 연극에 대한 비평적 글이 실리는 매체의 거의 전부다. 그런데 이들 매체는 대중과 교감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크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연극평론', 현대미학사의 'PAF' 등 서울의 전문 매체도 있지만 여기에는 부산 평론가가 쓰는 부산 작품 비평은 거의 실리지 않는다." 연극평론가 정봉석(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말이다. 평론가 허은(경성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는 "전문가들을 위한 '부산연극학회지'조차 위기에 처해 있다. 여기에 논문 등을 발표해봐야 점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나오는 학회지에 글을 싣기 위해서만 안간힘이다"라고 말했다.

춤으로 가면 들판은 더욱 황량하다. 현재 무용에 대한 비평을 꾸준히 쓰고 있는 비평가는 '예술부산'에 춤 평론을 쓰는 배학수(경성대 철학과) 교수뿐이다. 그마저 배 교수의 본령이 철학자라는 이유 때문인지, 현장에서는 반응이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식으로 단정적이거나 들쭉날쭉할 때가 많다. 한국춤평론가회에 속한 평론가로 채희완(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등이 있지만 채 교수는 민족미학연구소 소장으로서 민족미학을 정초하는 일에 더 매진하고 있어 현장 비평은 뜸하다.

이 같은 비평 부재 현상은 부산 공연예술의 피드백(feedback) 부진, 관객과 작품의 소통 위축, 연극과 춤 장르의 담론 실종으로 직결되고 있다. 문학의 경우 '오늘의 문예비평' 동인 등 다양한 비평가들이 버티고 있어 부산을 '비평이 강한 동네'로 한국 문단에 각인시킨 반면, 연극과 춤계는 '오늘 부산 연극의 문제는 이것' '부산 춤이 나갈 방향' 등 해당 장르의 생산자-수용자-비평가가 공유하는 담론이라 할 만한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만들고 소비하고 만들고 소비하는 공정이 있을 뿐이다. 비평이라는 작업 자체가 원래 대중과 일정하게 괴리될 수밖에 없는 영역임을 인정한다 해도 지금의 상황은 지나치게 나쁘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잃어버린 고리' 복원의 길

부산 지역의 연극과 춤 등 공연예술계에서 비평 문화가 실종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올해 상반기 부산에서 열린 연극과 춤 공연 장면의 합성.

연극에서는 원인과 대안이 비평가들 사이에서 별 이견 없이 제시됐다. "지면이나 매체가 없는 점이 제일 큰 어려움이죠. 그러는 사이 인터넷을 통해 연극의 생산자와 수용자들이 곧장 만나요. 관객들은 나름의 평가를 확대재생산해요. 비평의 자리가 줄어든 거죠. 문제는 그런 대중적 평가 말고 엄정한 전문적 비평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예요." 젊은 연극평론가 구명옥 씨의 의견이다.

언론의 구실도 제기됐다. 연극평론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이전 '국제신문'에서 정기적인 연극비평을 게재할 때가 가장 좋았다." 격월간이거나 계간이 대부분인 전문지에 글을 싣는 것은 기록하고 평가를 남긴다는 의미는 있지만 소통한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의 반성도 있었다. 허은 교수는 "평론가들의 권위의식(권위주의와 같은 말로 들렸다)이 있었다. 작품을 볼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다는 의식이다"라고 말했다. 창작자의 고민과 고통까지 이해하면서도 날카롭게 쏘아주는 비평 앞에서 창작자들은 열린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창작자들도 반드시 재고해야 할 단골 논리가 있다. "새싹을 자르지 말고 파이를 키워놓고 잡아먹으라"는 평론에 대한 항변이 그것이다. 평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 논리를 갖다댈 때, 즉 한쪽(비평)은 자신을 강자로 한쪽(창작)은 자신을 약자로 생각할 때 수평 토론은 이뤄질 수 없고 작품과 담론은 정체되기 쉽다. "파이를 키워놓고 잡아먹으라"는 지속적인 항변의 결과는 한 가지, 파이는 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극 쪽은 △평론가들의 부산연극협회 홈페이지나 자체 온라인 공간 마련 등 인터넷 진출 △지면과 매체의 확보 노력 △연극계 전체의 적극적인 수용 등으로 대안은 대체로 정리된다.

그럼 춤계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춤 예술 취재의 일선에서 듣는 중견 이상 춤 예술인들의 고충에는 공통점이 있다. '생산자 중심의 논리'라는 것이다. "지원금이 적다" "무용수 구하기가 어렵다" "옛날 같지가 않다" 등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한발짝 떨어져서 전체를 조망하는 제3자의 비평적 시선이 없다. 심지어 관객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통하겠다는 방법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관객과 비평 등 '외부'가 개입하지 못하는 구조는 일방적이고 폐쇄적으로 변질된다. 이렇게 폐쇄적 또는 자폐적 구조에서는 감 놔라 배 놔라 할 비평가를 키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비평이 성장할 수 없다.

춤계의 경우, 폐쇄성을 깨고 세상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전환의 선상에서 비평 인력을 발굴하고 키우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귀명창이 있어야 소리꾼도 신이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