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하철 휴게 공간에서는 다양한 문화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1년여 동안 열린 공연만 무려 164차례. 지난 4월 20일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에서 열린 김옥련 발레단의 '숲속 발레'

지난 4월 20일 지하철 2호선 전동차는 서면역에서 경성대·부경대역까지 '문화'를 싣고 달렸다. 어린이날 특별공연을 준비 중이던 김옥련발레단이 객차 안에서 깜짝 공연을 열었던 것이다. 발레리나들은 객실을 다니며 춤췄고 승객들은 다행히(?) 이 깜찍한 문화적 습격을 반겼다. 이 단체의 어린이날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대학생 정은비(23·부산 사하구 신평동) 씨는 매일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을 기다릴 때 언제나 승강장에 음악이 흐르니까 그걸 조금씩 즐기게 되더라고요." 학교 갈 때 '엘가의 행진곡', 집에 갈 때 '유모레스크'하는 식이다. 부산교통공사는 지난 2004년 6월부터 모든 지하철 역사에서 음악방송을 하고 있다. 음악방송은 원래 부산교통공사의 '지하철 자살방지용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도입됐다. 한때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하는 시민이 늘자 승강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보자는 의도였다. 이 사업이 지금은 부산 지하철의 문화코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부산 지하철의 문화선언=지난해 5월 24일 부산교통공사는 경성대와 '지하철 문화예술 협약식'을 가졌다. 부산 지하철이 '문화 지하철'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한 순간이었다. "옛 부산교통공단이 그해 1월 부산교통공사로 전환하면서 '파업' '인상' 등 기존의 딱딱한 이미지를 벗고 시민들에게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신규 고객도 창출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 문화적 접근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최정석 고객홍보팀장의 설명이다.

이후 문화를 싣고 달리는 지하철은 속도를 냈다. 지금까지 신라대, 가톨릭대, 동의대, 동의과학대, 동주대, 부산국제영화고, 부산디자인고, 부산영상고 등과 문화협약을 맺었고 부산예술대와 협의하고 있다. "문화협약을 맺으면 각 학교가 역사에서 전시 공연 등 문화행사를 할 수 있도록 교통공사가 적극 지원한다"고 김문태 고객홍보팀 차장은 설명했다.

'시가 있는 지하철' 사업도 눈길을 끈다. 부산 지하철 90개 역사에 200여 개의 시화가 전시되고 있다. 지하철역에만 가면 부산에서 열리는 문화행사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모든 승강장에 '이달의 부산 문화행사 안내포스터' 2종이 내걸린다. 2호선 전포역에는 시민도서관과 종로갤러리가 조성돼 있으며 3호선 강서구청역에도 서화갤러리가 들어섰다. 또 지하철 1호선 승강장에 설치된 인포비전에서는 부산에서 열리는 굵직한 문화행사 안내가 무료로 게재되고 있다. 환승역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역의 여유 공간은 부산국제연극제,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 등 주요한 행사가 열릴 때마다 쇼케이스 공연과 홍보 활동이 단골로 펼쳐진다.

2월에 연산동역에서 열린 런던 카니발 공연 장면.

●'어떻게'에 대한 고민과 전략 깊어져야=그러나 지하철의 문화 행보가 현장에서 마냥 환영받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고객홍보팀 박철우 씨는 "대체로 환영받는 분위기지만 시끄럽다거나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시민의 불평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공사 측은 이 같은 의견을 올해부터 문화행사의 기획에 반영했다. 지난해에는 의욕이 넘쳐 상대적으로 소리가 크고 번잡한 록밴드 공연까지 실시한 반면 올해 상반기에는 클래식과 퓨전음악의 비중을 늘렸고 전시 쪽을 강화했다. 최정석 팀장은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지적도 귀기울일 만하다. 지난해 12월 부산교통공사가 후원하고 부산참여자치연대가 주최한 '지하철 문화운동과 모니터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에서 류성효 재미난 복수 아트디렉터는 발제를 통해 '공공퍼니처(가구)를 포함한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 영역을 적극 도입해야 하며 각 역의 차별화된 이미지 구축, 전시공간의 수준 향상, 부산비엔날레 등 주요 문화행사와 적극적 연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금처럼 행사 중심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과 결합해 부산의 도시 디자인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획으로 지하철 공간을 품위 있게 가꾸고 이 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품격까지 덩달아 올려놓는 나라들의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리 있는 지적이다.

홍보행사와 DEU오케스트라 공연

●'부산의 길'로 가야=하지만 당분간 부산은 부산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에는 비용, 기획력, 시간, 시민의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산의 길에도 긍정적 전망은 분명히 있다. 세계 주요 도시 지하철과 비교하면 그걸 알 수 있다. 런던의 지하철은 수송 기능에 치우쳐 있다. 베이징 지하철은 차량이 빨리 달려야만 어두운 터널의 벽면에 설치된 광고판의 불빛이 살아나서 승객이 그 광고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다. 무서운 속도로 직진하는 '자본주의 중국'의 상징 같았다. 오사카의 지하철은 시민 편의 시설이 완벽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파리의 지하철은 긴 역사를 반영하듯 단조로웠다. 런던 파리 베이징 오사카 지하철의 공통점은 지하철이 나서서 시민에게 문화예술을 제공할 필요가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고 관광지이며 문화공간이 넘쳐나기 때문에 지하철은 훌륭한 역사를 짓든지 아니면 그저 승객을 실어나르고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주면 되는 것이다.

부산은 문화에 관한 한 모자란 것이 너무 많아 지하철이 개입하고 제공할 '문화'가 있다는 점에서 사정이 다르다. 이런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세계의 사람들이 부산에 왔을 때 "희한하게 부산은 지하철에서 문화 활동이 많이 이뤄지는군요. 이렇게 개성 있는 모습은 세계적으로 드물어요"하고 평가하는 '역설의 가능성'마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지하철역은 근본적으로 교통을 위한 공간이므로 시민의 통행과 쾌적한 이용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전시 공연 등 문화활동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 원칙은 분명히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적 관심과 시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박기현 부산교통공사 기획본부장의 말에서 '문화 지하철'의 고민과 가능성을 동시에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