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세계 물의 날(3월 22일)을 맞아 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일깨워주는 각종 행사들이 이번 주 내내 여기저기서 물결쳤다. 물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무심한 우리네 오만한 마음을 씻어주는 계기가 되었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물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물로 보는'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이다. 물에 대해 대중이 가진 이런 이율배반적 시각을 경계하는 문학작품들이 꽤 많을 법하다.
'우린 수마(水魔)란 말을 쓴다/생각해 보면/우리가 물길을 막아 놓은 것 아닌가/물의 길에 우리가 살고 있었던 것 아닌가/바닷물을 데워/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의 길에 속도를 가했고/땅으로 내려오는 비의 길을 어지럽혀/어쩔 수 없이 폭우가 쏟아진 것 아닌가//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라니/수마란 말은 차마 입에도 담지 말자/우리 몸이 물이고/물이 생명인데/물을 마(魔)라고 하면/너무 자학적이지 않은가/너무 반성이 깊지 않은가'(함민복 시인의 '큰물')
'우리 몸이 물이고'(인체의 70%가 물이니까), '물이 생명인데'(체내 수분이 5%만 부족해도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고, 탈수율이 12%가 넘으면 생명이 위협 받으므로)도 평상시에는 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오만불손한가. 그러다가도 하루라도 씻지 못하면, 몇 시간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얼마나 생난리를 치는지. 물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다.
물은 생명을 창조하면서 때로는 죽음으로 이끌기도 하는 두 얼굴을 가졌다. 한 도시를 휩쓸어 버리는 막강한 힘을 가졌는가 하면 햇볕에 반짝이는 잔물결처럼 황홀한 아름다움도 갖췄다. 대기와 지구를 오가며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순환하는 불멸의 존재인 물, 인간에게 근원 그 자체다. 이러한 전지전능한 물에 영감을 받은 문학 회화 미술 음악 건축은 예술의 꽃을 활짝 피웠다. 육지 안의 물을 다루는 이학(理學)인 수문학(Hydrology)을 한자로 '水文學'이라고 쓰는 이유도 물에 생래적 문학성이 깃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1991년 '하렘, 그 베일에 가린 세계'란 책으로 필명을 드높인 여성작가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의 또 다른 저서 '물의 역사'(윤희기 옮김·예문)는 세계의 신화 풍습 예술 속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를 밀도 있게 추적하고 있다.
물의 이미지를 논할 때 프랑스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를 빼놓을 수 없다. "대지의 참다운 눈은 물이다. 그리하여 물은 대지의 시선이 되고 시간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는 '물과 꿈'(이가림 옮김·문예출판사)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상상력의 세계에도 뚜렷한 질서가 있다고 설파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의 물질적 특성에 따라 구분된다는 그의 유명한 학설. 그는 물이 가진 물질적 역동적 상상력에 주목했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며, 그것도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바슐라르의 사상은 전문 연구자가 아닌 한 명쾌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물에 대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며 사고의 지평을 넓혀 준다는 사실이다. 바슐라르의 세례를 받은 이는 예전에는 더럽다고 느꼈던 구정물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구정물은 이 세상 어느 한 존재를 씻어줌으로써 자신은 더러워진 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