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대왕 세종'을 보면 책 얘기가 자주 나온다. 선왕 태종에게 눌려 아직 제 색깔을 내지 못한 채 혹독하게 '국왕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위로는 태종의 호령, 아래로는 주류 신하들의 방자한 기세에 끼어 고통 받는 세종이 찾아드는 곳은 다름 아닌 책 속이다. 측근들이 언제까지 책 속에 숨어 나오지 않을 것이냐고 힐난하지만 세종은 변하지 않는다. 책은 도피처가 아니라 길이 있는 곳이라는 신념 때문이리라.
훈민정음 창제 같은 큰 공적을 이룩한 세종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써 책을 선택한 셈인데 조선시대의 책, 오늘날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시대 책의 이면사에 대해 탄탄한 공력을 쌓고 있는 저자 중 한 명이 아주대 이민희(교양학부) 강의교수다. 2007년 10월 출간된 그의 저서 '조선의 베스트셀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에 불기 시작한 소설 열풍과 이것에 편승해 돈벌이를 했던 책쾌(책 대여업자)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옥살이 같은 사대부 규방 생활에 염증이 난 여인들이 소설 읽기에 빠져드는 대목은 영화 '음란 서생'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생생했다. 책의 출간과 유통을 나라가 통제했던 조선시대였으니 그럴만 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책은 상상외로 '위험'했다. 이민희 교수가 최근 펴낸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글항아리·1만5800원)은 그 내용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책의 잔혹사라 할 만하다.
이 책이 열 번째 얘기로 전하고 있는 '명기집략 사건'을 보자. '명기집략(明紀輯略)'은 청나라 주린(朱璘)이 지은 역사서. 이 책은 이성계가 쫓아낸 권신이 그의 부친이라고 하는 둥 조선 왕실에 대해 악의적인 왜곡을 했다. 당연히 조선 왕실은 이 책을 금서로 지목하고 읽는 것은 물론이고 유통을 일절 금지했다. 그러던 중 주린이 지은 또다른 책 '강감회찬(綱鑑會纂)'이 시중에 나돈다는 상소가 영조에게 올라왔다. 왕은 노발대발하면서 '강감회찬'은 물론 명기집략 등 주린이 저술했거나 참고한 책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조사가 시작되면서 생각보다 많은 서생들이 이 책들을 읽었고 소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처벌이 시작되었다. 형리가 청파교에서 사대부 이희천·정림·윤혁, 책쾌 배경도 등의 목을 잘라 사흘간 장대 위에 매달았다. 처형자의 처자식들은 모두 흑산도로 보내 평생 관노비로 일하게 했다('영조 47년 실록'). 금서와 목숨이 교환된 것이다.
책과 함께 저승길을 떠난 이도 있었다. 무덤에 1000여 권의 책을 순장한 것. 열두 번째 이야기 '18세기 백과사전의 시대가 열리다'중에 나온다. 주인공은 뛰어난 문인이자 장서가였던 정윤과 그의 부친 정희교다.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에 미친 사람들'. 정윤은 아버지와 함께 속리산 기슭에 죽을 때까지 숨어살았다. 정윤 부자가 사는 집은 1000 여권의 책들이 들어차 사람이 움직이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정윤은 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책을 끼고 갔다. 부친이 여든 살이 넘어 별세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모든 장례를 직접 치르고 집안에 있던 모든 책들을 무덤에 넣었다. 죽어서라도 책을 곁에 두려 한 그 열정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책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책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 책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