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가덕도 외양포 포진지의 벙커. 1920~1930년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릴리오는 "전쟁 뒤에 방치된 벙커는 마치 폐허가 된 아즈택(Aztec) 사원 같았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동아대 강영조 교수

정보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시대다. 이 시대를 잉태한 원천을 꼽으라면 사유의 힘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생각하는 일을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화 현상들을 철학자들의 시선으로 살펴보고 해법을 함께 고민하는 기획 '현대 문명, 철학에서 길을 찾다'를 매주 목요일 연재한다.

- 과거 전쟁 발발할 땐 대피하거나 준비 가능
- 핵무기가 등장하면서 초음속 공습·초토화…핵은 속도 문명의 정점

- 가덕도·장자등 벙커, 과속 추구하다 추락한 일본 군국주의의 흔적
- 속도 맹신의 말로 상징, 반면교사 교육장 삼아야

- 반성없이는 진보 없어
- 기술문명 발전에 따른 속도 의존 줄여가며 자신만의 시간 되찾기, 실천해 보는게 어떨지…

현대 정보기술은 지금 우리 앞에 없는 것들을 생생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원격 현전(tele-presence)이란 것이다. 여기에 몰입한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자기 주변이나 눈앞에 있는 것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 오직 저 멀리, 실제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도 않는 지평 너머에 있는 것만을 화면으로 주시하는 것이다.('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속도가 세계를 지배한다

이것은 어쩌면 생생한 시각의 상실이 아닐까. 현대 정보기술에 익숙해진 우리는 현실 세계에 무감각해진 게 아닐까. 이런 시각 상실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돈다는 빛의 속도로 공간을 극복하는 기술에서 비롯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속도의 기술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인의 시각 상실은 '핵 억지력'이란 개념과 직결된다. 어느 나라에 핵무기가 있다면 다른 나라는 쉽게 움직일 수 없다. 핵전쟁이 나면 일순간에 공멸하니까 서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가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핵 억지력이란 속도 지배다. 멀리서 상대방 속도를 빼앗아 원격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젠 속도를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하고 세계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런 속도 지배는 사람들의 생생한 관계를 약화시키며, 공간을 소멸시킨다. 가만히 앉은 채 비행기로 이동하는 승객, 앉아서도 세계 주식시장을 넘나드는 투자자. 이들에게 공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고속열차가 달릴 때 정거장 사이 마을들이 무의미해지듯이. 현대 사회는 '자동차로 몇 시간', 즉 소요 시간으로 지리적 거리를 표현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던 공간의 의미가 사라지고, 숫자로 표현되는 속도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기술과 전쟁은 같은 뿌리다

이 속도 문명의 정점에 핵무기가 있고, 정보기술이 있다. 단 1초 만에 세상을 파괴하는 기술과 단 1초 만에 전세계와 소통하는 기술은 결국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넓은 공간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란 면에서 쌍생아다. 그래서 핵무기만큼 두려운 건 속도 숭배이다. 더욱 두려운 건 우리들의 속도 숭배가 그칠 줄 모른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인류가 기술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봤지만, 비릴리오는 기술과 전쟁이 본래 뿌리가 같다고 본다. 현대 기술은 인간 한계를 넘은 '절대속도'를 향해 달린다. 진솔한 대화도 줄고, 현실의 신체 감각이나 감정도 줄고 있다. 절대속도는 그저 무관심에 도달하게 만든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싸우던 로마 검투사의 잔혹함이나 비애 따위는 느낄 새도 없다. "내가 미국인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히로시마가 전쟁 행위가 아니라 실험이었기 때문이다."('정보과학의 폭탄')

과거에는 적대국의 공격을 미리 피하거나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전의 재난은 그것이 발생한 뒤에야 알 수 있다. 공습이 초음속이므로 경계 경보를 울리기까지의 시간도 거의 없다. 최고 권력자가 판단할 시간도 거의 없다. 결국 절대속도는 사람의 판단 대신 자동 경보와 방어 체계라는 기계적 과정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내몰고 있다.

■벙커는 전쟁 역사의 마지막 제스처

이런 면에서 벙커는 용도 소멸된 것이다. 부산 금련산 벙커가 군용 시설에서 해제된 걸 봐도 알 수 있다. 전쟁 때 '임시정부'를 위한 대피 시설이었다는데, 이젠 정부가 그렇게 멀리 대피할 시간이 없다. "벙커는 서양 전쟁 역사가 남긴 마지막 연극조의(과장된) 제스처이다."('벙커 고고학') 그럼 가덕도와 장자등 벙커와 포진지는 일본 군국주의 마지막 '연극조의 제스처'가 아닐까.

이곳 해안포들은 한 번도 일본이 바라던 효과를 발휘한 적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해안포가 어쩔 수 없는 '하늘'에서 날아왔다. 일본 군국주의의 아이러니다. 그토록 현대 기술과 속도를 추종하더니 해안포를 압도하는 속도의 비행기, 또 원자폭탄이란 절대속도 앞에 무너진 것이다.

부산지역 벙커를 반면교사로 삼자. 특히 가덕도와 장자등 벙커는 보기드문 해양 문화 유적이다. 해양 국가를 내세우면서도 아름다운 바다를 전장으로 만든 군국주의, 또 속도를 추구하다 절대속도에 멸망한 군국주의 유적이다. 이것은 흘러간 얘기도, 남의 얘기도 아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해 절대속도를 맹종하는 인류 문명을 다 함께 반성하자는 의미다.

■가덕도 벙커는 해양 문화 유적이다

분명 비릴리오는 현대 기술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속도 광신의 위험을 경고한다는 면에서는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그는 속도 광신에 맞서기 위해 저마다 자신만의 시간을 발명하자고 제안한다. 다양한 시간 리듬을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예술에선 비디오아트와 춤에서 희망을 찾는다. 비디오아트는 일률적인 시간 흐름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춤은 그걸 생생한 신체로 느끼게 한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절대속도 앞에 무용지물이 된 금련산 벙커를 미디어아트센터로 만든다니 반가운 일이다. 벙커의 문화적 의미를 잘 살리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면 세계적으로 특별한 공간이 될 것이다.

부산지역 벙커 유적이 속도 문명을 늦추는 '쉼표'가 되면 좋겠다. 속도 문명을 반성하는 상징적 거점이 되는 것이다. 반성이 없이는 진보도 없다. 원자폭탄 잿더미에서 부활한 일본은 결국 원자력의 문명적 의미를 되새기지 않았기에 다시 원자력 재난을 겪는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원자력 발전 축소, 국제 핵무기 철폐 같은 일이 이뤄지려면 이런 반성이 필요하다. 저마다 기계에 의한 속도 의존을 줄이고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자는 생각, 한 번 실천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 폴 비릴리오는

- 佛 철학자·건축가·전쟁학자, 인류재앙 예언 한다는 뜻에서 '21세기의 카산드라'로 불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1932~·사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건축가, 도시계획가, 전쟁학자, 문화비평가, 현대예술 큐레이터이다. 현재 해양도시 라로셀에서 노숙자 숙식을 돕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인류 재앙을 예언한다는 뜻에서 '21세기의 카산드라'로 불린다. 최근 10년 간 세계적 관심을 받으며 재해석되고 있다.

그는 항구 도시 낭트에서 자랐다. 독일 잠수함 기지가 곁에 있었기에 당시 해안은 접근금지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바다로 달려갔는데, 거기서 이상한 건축물들을 발견한다. 그건 벙커였다. 독일군은 '대서양 방벽'을 지키려고 프랑스 해안을 따라 무려 1만5000개 벙커를 만들었다. 이렇듯 한 소년이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를 본 날, 전쟁 시설인 벙커를 만난 것이다.

그는 벙커를 스케치하고 사진도 찍었고, 마침내 1975년 퐁피두센터에서 '벙커 고고학'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전시회를 찾았고, 프랑스 정부가 해안 전쟁 유적 관광화사업을 벌이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부터 20여 권의 저서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많은 책들을 하나로 꿰뚫는 낱말은 '속도'다. 현대 문명이 속도 숭배에 사로잡혔고, 여기서 모든 비극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전쟁 뒤에 무너진 벙커 모습에 착안해 '경사기능'이란 건축 이론을 제안했다. 건축에 경사면을 도입해 운동감 있고 역동적인 건축물을 만들자는 것이다. 부산 '영화의전당' 등과 같은 '해체주의' 건축의 선구자다.

철학자 비릴리오는 이렇듯 해안 벙커에서 즉 바다, 전쟁, 건축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지훈은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미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필로아트랩'(PhiloArt Lab)을 세워 철학과 예술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 연구·기획을 하고 있다. 최근 거리예술 창작단체 '랄랄라 스트라다'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존재의 미학'을 비롯해 3권의 저서와 '우리가 만드는 문화도시' 등 10여 권의 공저가 있다.

이지훈 철학자·필로아트랩 대표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