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헌주 'Signpost-Stop'(멈춤 표지), 2009. 50년 추억이 쌓인 삼성극장 철거를 안타까워하는 '작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했다. 이 시대의 거대 논리인 '개발주의'에 작은 시민들이 오히려 중단을 말하는 역전이 일어났다. 이지훈 제공

- 지배세력에 속하지 않아도 발언할 수 있는 무대 마련이 진정한 정치이자 민주주의
- 긴 안목 없는 직접민주는 공허한 외침이 될 가능성
- 대중이 창조성을 실현하는 제도와 교육환경이 중요

전국 곳곳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다. 그 앞을 지날 때는 누구라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겼다. 대개 왕, 고관의 출생지나 묘 앞에 있으니, 이곳 선열에게 존경을 표현하는 상징물임을 알 수 있다.

하마비는 대단한 발명품이다. 작은 돌 하나에 인물과 장소성이 결합한 '스토리텔링'을 담았다. 이것이 주는 강력한 감성적 효과로 새로운 공간적 경계를 만들고, 사람들의 행동마저 바꿔놓는다. 지체 높은 양반들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하마비는 공간을 가르고, 신체 위치와 움직임을 재배치하는 '퍼포먼스' 장치였다. 이 퍼포먼스는 사회질서의 가시적 표현이다. 말에서 내리는 귀족이나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이나 모두 자신을 압도하는 질서의 권위를 느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감성 차원에서 집단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의 발명을 정치적 행위의 핵심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하마비는 정치적 상징물이다.

■하마비는 정치적 상징물

부산에도 부산진구 하마정과 금정구 범어사에 하마비가 남아있다. 형태는 비슷해도 정치적 의미는 다른 듯하다. 하마정은 부산지역 명문가이던 동래 정씨와 연관된 곳이다. 이곳 하마비는 기존 질서의 가시화인 셈이다. 하지만 범어사는 다르다. 조선 명종 때 유생들이 난입해 절을 훼손한 일이 있은 뒤 전국의 큰 절에 하마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승려는 거의 사람 취급도 못받던 천민이고, 유생은 지배 세력이란 점에서 특이하다. 이곳 하마비는 지배 질서를 부정하고 위협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이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과정으로 이뤄진다고 본다. 하나는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합의를 유도하는 과정으로 '치안'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는 이 치안의 틀에서는 '말할 자격이 없는 자'로 분류되던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해방의 과정이다. 이 상반된 과정들이 마주치는 무대를 마련하는 것. 즉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불화'의 장을 마련하는 게 진정한 정치란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불화의 장 마련

이를테면 한 사회에서는 어떤 언어나 감성이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배제된다. 참된 정치란 이 경계 외부로 밀려난 것들이 기존 언어와 감성을 흔들며 제 권리를 찾는 행위를 뜻한다. 가령 19세기 초만 해도 '노동자'는 '지식인'의 반대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방식에서 벗어나, 밤에 읽고 쓰고 생각하고 토론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바꿨다. 밤이란 시간을 재창조해 노동자와 지식인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 것이다.

또 19세기 중반 노동자들은 사장을 비롯해 누구라도 작업장에 들어올 때는 모자를 벗으라고 요구했다. 그건 예절을 바란 게 아니었다. 작업장을 사장 개인의 사적 공간이 아닌 회사 구성원 모두의 공적 공간으로 바꾸며, 작업장이란 공간의 의미를 재창조한 것이다.

■새로운 시공간 발명은 예술의 핵심

예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공간의 발명은 예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랑시에르는 19세기 유럽 문학이 새롭게 태어난 것에 주목한다. 플로베르 소설은 교회 종소리, 사소한 몸동작, 실내 한 귀퉁이 골동품 등 거의 모든 것을 묘사했다. 이렇게 해서 일상이 전면에 나서고, 모든 것이 말할 자격을 얻었다. 고전 문학과 다른 감성의 질서가 나타난 것이다.

근대 문학은 이것을 '가르치는 대신 묘사'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으로 실현한다. 그래서 근대 문학은 '민주주의 체제'이다. 작가 생각을 주입하는 대신 모든 것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평등성'을 구현한 것이다. 이처럼 예술이 감각 질서를 바꾸며, 공동체에 새로운 존재 방식을 부여한다는 면에서 예술과 정치의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그럼, 이 민주주의적 평등성이 제대로 실현된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 랑시에르가 볼 때는 누구나 '나도 예술가다. 나도 정치인이다'라고 말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내게도 영혼이 있다, 다른 이들과 소통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며, 저마다 평등한 이들이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시끌벅적한 사회인 것이다.

■대중은 '말하는 존재'

이런 생각은 '직접민주주의'를 함축한다. 기성 예술계와 정치권은 '말할 자격이 없는 자'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직접민주는 양면적이다. 분명 대의민주의 한계를 넘어 기성체제를 개선하는 면이 있지만, 긴 안목이 없는 직접민주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이 점에서 나는 랑시에르의 사상이 그리 새롭다고 여기지 않는다. 또 현실적인 해답을 준다고 믿지도 않는다. 영화 '댄싱 퀸'에서 시장 후보 황정민은 분유 값도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저출산 대책을 세우냐며, 시민 모두의 '직접 참여'를 감동적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1000만 명이 모두 머리를 맞대는 식의 참여는 실현하기 어려울뿐더러, 시장 후보가 제시할 만한 현실적 해답은 아니다.

또한 랑시에르의 직접민주는 예술에서나 정치에서나 근원적 평등성을 근거로 한다. 대중들은 누가 대신 대변해야만 하는 '말없는 존재'가 아니며, 이미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말하는 존재'이니까. 또 그들의 말은 이미 새로운 세계를 담고 있고, 그 세계의 구성이 바로 예술이며 정치이니까. 하지만 이 숭고한 진리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사회 문제에 스스로 참여하는 시민

	이지훈

현실적으로 대중들이 창조성을 실현하려면, 그걸 돕는 제도나 교육 환경도 중요하지 않을는지. 또 예술가/시민, 전문가/비전문가 구별이 사라지려면, 그 경계(/)를 순환의 이음표로 바꾸는 연대와 상호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지. 그렇지 않다면 '사회 변화에 지식인의 역할은 없다'고 말한 랑시에르가 20권의 책을 펴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경계 안팎에서 함께 애써야 경계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랑시에르의 생각에서 배울 점도 많다. 핵심은 '스스로'에 관한 것이다. 교육은 기성 예술과 정치에서 배제된 이들이 스스로 창조적인 시공간을 발명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것. 또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 문제에 참여해서 해결하는 비중을 높이자는 것. 그리고 새로운 예술과 정치의 토대인 새로운 감각이 때론 불편할 수 있지만, 그 불편함이 사회를 스스로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

그는 이처럼 '정치가 사라지고 경제만 남은' 이 '정치-이후'(Post-politics) 시대에 시민들의 자체 역량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 자크 랑시에르

- 평등한 대중이 주인공이 되는 사회 소망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1940~·사진)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학자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정치철학 저술을 발표했으며, 1996년부터는 문학 영화 등을 중심으로 정치와 예술의 연결점을 생각하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평등성, 창조성을 바탕으로 급진적 이론을 제시한다.

특히 제한된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선 직접민주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선 미학을 모색하는 관점에서 폭넓은 분야의 관심을 받고 있다. 국내 문학계에선 당대 한국 문학의 변화를 설명하고 방향성을 모색하는 관점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됐다.

그는 '볼 수 없던 걸 보이게' 하고, 우리의 감각을 바꾼다는 면에서 예술과 정치의 뿌리가 같다고 믿는다. 이때 감각은 세계의 바탕인데, 감각이 바뀌면 시공간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생각을 토대로 서로 평등한 대중들이 모두 주인공으로 서는 무대를 희망한다. 즉 투표일 하루만이 아니라, 날마다 사회의 주인공이 되고, 날마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무대. 그 소란한 불화의 무대를 마련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생각을 현실 문제 해결의 도구로 쓰기엔 어려운 점이 많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는 누구나 스스로를 표현하며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바란다. 이것은 예술에서나 정치에서나 '메시아'가 나타나 문제를 모두 풀어주기 바라는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생각이다. 시민 자체의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또한 대중의 평등성, 창조성에 대한 생각은 시민사회의 걸림돌이 '무지'보다는 '자기 무시'란 점을 확인해줬다.

이지훈 철학자·필로아트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