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문 작 BUSAN METROPOLITAN CITY (2009). 부산시를 갈매기 형상으로 재해석한 지도. 이처럼 도시 공간을 다시 쓰는 상상력은 도시의 서정,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실마리가 된다.

- 건축가 ·도시계획가들이 만든 메마르고 획일적인 현대도시
-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청사포' 유래에 얽힌 이야기 등 숨겨져 있던 스토리 찾아내고
- 창의적으로 새롭게 만들어가면 한결 아름답고 풍성한 도시될 것

1921년 4월 14일. 브르통, 차라, 피카비아 등 수십 명의 예술가가 파리의 한 교회에 모였다. 이른바 '다다 소풍'(Dada Excursion). 이 낡고 볼품없는 교회는 그들에게 하나의 '기성품'(ready-made)이었다. 마치 작가 뒤샹이 일상 사물을 예술 차원으로 재배치했듯이. 그들은 예술 행위를 통해 이 교회를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고, 사람들이 이곳을 색다른 맥락으로 다시 바라보길 바랐다. 말하자면 도시 공간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했다.

■현대도시 두 가지 요소 힘 관계

드세르토는 현대도시가 두 가지 상반된 요소들의 힘 관계로 이뤄진다고 본다. 하나는 건축가, 도시 계획가, 권력이 만든 질서. 또 하나는 그 속에 사는 '사용자'들의 일상생활. 둘의 힘 관계는 은밀하고 팽팽하다. 대개 사회비판 이론가들은 일상생활이 기성 질서에 수동적으로 지배된다고 여기지만, 실제 일상생활은 지배 질서를 견디고 이겨내는 '책략'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위에서는 정책을 만들고, 아래서는 빠져나갈 대책을 세운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중국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관료주의 폐단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수천 년 동안 '나쁜 정치'에 시달려온 민초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드세르토는 전략과 전술을 나눈다. 지배 권력이 체계적인 전략을 만들면, 일상인들은 거기에 맞서 유동적인 전술을 만든다.

이 전술이 돋보이는 영역은 도시 공간의 재구성이다. 태양처럼 높은 곳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권력의 시선과 달리 '저 아래' 도시 공간에 녹아들어 있는 일상인들은 도시 전체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도시 계획가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되는 '개념 도시'를 만들려 한다면, 일상인들은 저마다 그 연결을 건너뛰거나 재구성한다.

일본 규슈의 어느 산골 이야기. 어린 아들이 심심해하자 어머니는 "보물찾기라도 해보렴"하고 농담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들은 마침내 스무 개가 넘는 보물을 찾아왔다. 재미나게 생긴 돌, 예쁜 들꽃, 맑은 물길, 기분 좋은 숲, 작은 돌무덤, 길가의 불상, 논에 쌓은 석축, 새끼를 잘 꼬는 할아버지, 뭐든지 만들어내는 아저씨, 옛날이야기를 많이 아는 할머니, 국화 문양을 잘 만드는 '달인' 등. 참으로 어머니도 깨닫지 못하던 보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보물이 있는 지점들을 이으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누구나 안다고 믿던 마을을 색다른 눈으로 보여주는 그림. 무미건조한 행정구역이나 도로가 아닌 소중한 보물들을 중심으로 공간 질서를 재편성하는 그림. 이것은 아무도 모르던 지도이다. 또 시각 표상만이 아닌 총체적 공간 체험과 추억과 자신만의 가치평가가 담긴 '마음의 지도'일 것이다.

드세르토의 메시지는 이렇다. 기존의 지도 체계 즉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따른 현대도시 개념은 도시를 메마르고 획일적으로 느끼게 만든다는 것. 반면 우리의 삶터를 살아있게 만드는 건 저마다 일상에서 펼치는 공간적 상상력과 실천이라는 것.

■도시 공간 다시 쓰기는 스토리텔링

"여긴 동네 빵집이 있었어."

"저게 이태석 신부가 살던 집이야."

"정면에 보이는 곳은 남선 창고였어."

물론 남선 창고는 이미 헐렸기에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 공간 체험은 이렇듯 가시적인 공간과 함께 다양한 '부재'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상력과 재구성을 북돋우는 것이다.

드세르토는 대도시와 자본주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거부하는 양자택일 대신 '상상력과 비판'이란 이중적 방식으로 도시를 재구성한다. 즉 도시에 머문 채 '다시 읽기'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거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대도시를 비판하며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를 찬미해왔지만, 이제 대도시의 특성에 맞는 관점으로, 또 일상적으로 대도시에 대응하자는 제안이다.

도시 공간의 다시 쓰기는 '스토리텔링'이다. 도시 계획가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한 편의 깔끔한 텍스트를 구상한다면, 일상인들은 파편적이거나 '여러 겹으로 겹친 이야기들'을 만든다. 가령 중세 한국의 도시계획 관점은 유교였다. 그럼 부산 '청사포'의 유래는 '푸른 모래'(靑沙)인가 '푸른 뱀'(靑蛇)인가. 거기서 정 씨 부인은 푸른 뱀을 따라 용궁에서 임을 만났던가, 아니면 소나무 곁에서 홀로 죽어갔던가.

이곳엔 모순된 결말을 가진 이야기가 공존한다. 그것은 기이한 자연력 이야기를 배제하던 유교 합리주의, 또 망부석으로 상징되는 가부장 질서 속에 뱃사람들이 일상적 공간 체험에서 우러난 상상력을 써넣었기 때문일 듯. 그 결과 '푸른 뱀'은 '푸른 모래'라는 도시 개념을 교란한다. 그러나 이런 '다시 쓰기'가 이곳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지 않을까.

일상인의 다시 쓰기에는 '오류'가 없다. 각자의 공간 인식을 보여줄 뿐, 저마다 정당한 것이다. 가령 승학산이 원래 승악(勝岳)인데, 20세기 초 승학(勝鶴)으로 '잘못' 바뀌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여기엔 동의하기 어렵다. 주민이 이곳을 인근 강선대(降仙臺)와 함께 학 상징으로 재구성한 건 단순히 오류라기보다는 또 다른 공간 인식을 표현한 거니까.

진정 살아있는 도시는 파노라마 시선에서 만들어진 깔끔한 개념 도시보다는 일상에서 '여분'의 이야기가 넘치는 도시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제거되면 도시의 상징 생산이 멈추며, 마음 붙이고 살 만한 곳이 없어진다. 따라서 드세르토는 기발하고 예술적인 도시 공간 재해석이 많아지길 바란다.

일상인에게나 예술인에게나 도시는 이미 주어진 공간 질서란 뜻에서 '기성품'이다. 작가 뒤샹이 소변기, 유리, 상자와 같은 사물을 예술 차원으로 재배치했듯이. 또 일본 규슈의 어린이가 보물찾기를 통해 보여줬듯이. 저마다 지도를 들고 도시 탐사에 나서자. 또 다른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상인들이 이렇게 창의적으로 도시를 재구성하고, 즐거운 마음의 지도를 만든다면, 우리는 이 도시를 새롭게 자각하고, 더 많은 사랑과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미셸 드세르토

- 佛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 권력통제·감시 벗어나는 길, 일상 실천·창조성에서 찾아

미셸 드세르토(1925~1986·사진)는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학자이다. 대표작은 '일상의 발명'(1980). 특히 '도시 속의 걷기' 항목이 유명한데, 근래 프랑스의 걷기운동인 '랑도네' 열풍과 연관해 재해석되는 한편 영어권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는 현대도시가 하나의 개념으로 개개인을 옭아매는 경향이 있다고 보며, 인류의 미래를 '일상의 창조성'에서 찾는다. 그동안 큰 담론에서 배제됐던 영역을 부각했다는 점, 또 정보를 장악한 권력의 통제와 감시 체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일상 실천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독특한 철학을 제시한다.

특히 '공간적 실천'과 관련해 일반적인 지도와 '여정'을 구분한다. 보통 지도가 'A는 B 옆에 있다'고 묘사한다면, 여정은 '오른쪽으로 돌아들어 가면 C가 있다'는 방식이란 것. 즉 지도가 공간 질서의 정태적이고 시각 중심 표상인 데 반해 여정은 행위와 공간적 실행 중심이라는 거다.

그가 말한 바로는 유럽 최초 지도는 종교 순례를 그린 '이야기 그림책' 즉 '여정'이었다. 도로 표시보다는 도보여행 일지였고, 행적과 사건을 그렸다. 하지만 과학혁명이 일어난 15세기부터 지도는 여정의 결과만 담았으며, 공간적 실천과 이야기 대신 지리적 장소만 표시하는 기하학적 도표가 됐다는 거다.

그는 여정의 회복이 일상 공간의 회복이라고 본다. 또 일상 공간의 실천이야말로 도시 계획가들이 짜놓은 삭막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출로라고 본다. 이 미시적 일탈의 실천으로 도시 공간이란 텍스트를 창의적으로 다시 쓰자고 제안한다.

이지훈 철학자 필로아트랩 대표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