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진의 'Tower & Palace-다름을 짓다'(2011). 시민 200명과의 협업 작품. 시민은 각자 집을 지었고, 작가는 그것을 다시 구성했다. 개인의 차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종교 공동체와 서민 주거지 공존
- 서로 다른 생활양식 혼재·갈등 속
- 뒷집 조망권 배려하며 주택 조성
- 아름다운 '혼종의 색채' 만들어내

- 부산시 재개발 아파트 위주 탈피
- 건물·공간 조성 좋은 원칙만 제시
- 나머진 시민 창의적 노력 맡겨야

건축 문화라는 면에서 부산시 정책은 안타깝다. 최근 해운대구 한진 CY(컨테이너장치장) 용도 변경 과정을 봐도, 부산시가 추진하는 재개발은 아파트 건축이다. 해안마다 삭막한 아파트 숲만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에 해양수도의 미래는 없다. 재개발하지 않는 곳은 역사적 공간의 보존 때문이 아니라, 수익성이 없어 내버려둔 지역일 뿐이다.

단기수익이라는 '현재'의 시각만으로 살아가는 도시. 이렇게 과거도, 미래도 살피지 않는 도시는 시민의 자긍심을 더해주지 않는다. 좋은 도시란 누구나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도시이며, '재미있는 도시'일 것이다. 건축의 관점으로는 삶에 활력을 주는 건축물과 경관을 갖춘 도시라고 생각한다.

이런 재미있는 도시가 하루아침에 이뤄지리라 믿진 않는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볼 때 '무계획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산복도로 건축은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특히 감천2동은 호미 바바가 말한 혼종성(hybridity)과 수행성(performative) 개념을 음미하게 한다.

■ 부산 감천2동 마을의 가치

감천2동을 구성하는 요인들은 여러 겹으로 겹쳐 있다. 이 태극도 마을은 1948년 이후 전국에서 특정 종교인들이 부산으로 모여들며 형성됐다. 특별한 땅에서는 재난을 피하고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다는 전래 신앙에 한국전쟁이라는 현실 재난이 겹치며 공동체 형성이 가속화됐다.

1970년대부터 이곳에는 종교와 무관한 서민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 경우엔 부산의 성장이 창출한 일자리, 또 저렴한 거주지라는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다. 그 뒤로 이곳은 종교 공동체와 서민 거주지가 공존하는 형태로 자라났다.

바바는 '혼종성' 개념을 얘기하며, 지역성이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감천2동도 복합요인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20세기 세계 질서의 확실성과 규범에 맞지 않는 혼합적이고 모호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곳은 전국 억양이 뒤섞인 것 같은 독특한 말씨를 만들어냈다.

또 바바는 혼종성이 '다문화주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다문화주의가 여러 가지 문화를 '조화롭게 예쁜 모자이크로 조합'하며 평화롭게 공존시키는 것이라면, 혼종성은 '분쟁이나 위기'를 전제한다는 거다.

감천2동은 상이한 태생의 사람들이 만난 곳.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이한 생활양식과 공간이 부딪쳐온 곳이다. 도시계획 측면에서 인근 마을과 명확히 나뉘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스스로 삶의 요구를 넓히고 갈등하며 새로운 문화적 표현을 생산했다.

산비탈에 펼쳐진 색채의 향연. 첫째 원인은 극단적인 주택 밀집에 있다. 16~20㎡ 정도의 작고 낮은 집들이 빈틈없이 붙어있다. 이들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빛깔이 만들어졌다. 즉 끊임없이 유입되는 서민들이 각자 자유롭게 거주 공간을 가꾸며 '혼종' 색채를 빚어낸 거다.

그런데 집들의 색채가 이렇게 단풍처럼 층층이 산비탈을 물들이기 위해선 집들이 서로 가리지 않고, 집집이 자신의 빛깔을 뽐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빛깔이 만개한다.

마침 주민이 오래도록 지켜낸 경관 원칙이 있었으니, '뒷집 조망을 막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 유일하고도 거시적인 규칙에 따라 수많은 개인의 건축의지가 자유롭게 펼쳐지고 타협한 결과가 바로 이곳 경관이다.

■도시경관 여백의 가치

바바는 교육학적인(pedagogical) 것과 수행적인 것을 나눈다. 전자는 교과서처럼 '미리 주어진 전체'를 제시하는 것, 후자는 다양하고 분산된 일상적 행동들. 달리 말해 전자는 건축가가 설계한 도시 공간, 후자는 일상인이 사용하고 만들어가는 도시 공간이다.

감천2동 경관은 뒷집 조망에 대한 교육학적 원칙과 일상을 통한 건축 실행이 갈등하고 협력한 산물이다. 한 사람의 설계자, 또는 한 번으로 끝나는 건축의 산물이 아니다. 주민 즉 사용자는 모두 건축 생산자였다. 이들이 스스로 세운 단순한 원칙과 함께 일상의 문화적 혼성물이 모여 놀라운 경관을 만들었다. 이런 '무계획의 계획'이 도시 공간을 재미있게 만든다.

칠레 '엘리멘탈'(ELEMENTAL) 프로젝트를 떠올려본다. 2003년,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칠레 곳곳의 도시 중심에 서민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 집마다 1000만 원 정도 지원되는 정부 예산으로는 집 반쪽밖에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악조건을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꿨다. 건축 시공을 완결 짓지 않고, 입주자에게 나머지를 맡긴 거다.

그는 주택 단지의 일반 배치, 기본 주거 구조와 전기 배선, 배관 등을 시공한다. 이때 주택 사이 간격을 크게 두는데,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뜻이다. 또 개별 단위는 부엌, 화장실을 설계하고 나머지 내부 외부 디자인은 입주자가 직접 꾸미게 비워둔다.

입주자는 36㎡ 공간부터 거주할 수 있지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70㎡까지 증축하고 복층으로 만들 수 있다. 이처럼 그는 건축가의 의도를 절제하는 대신, 지속적인 워크숍으로 좋은 건축 모델을 제시하며, 입주자의 창의성을 높여주고 있다.

텅 빈 가능성으로 존재하던 집들이 입주자의 노력에 따라 바뀌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칠레인들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생기 넘치는 도시 풍경을 빚어낸다. 과거 감천2동이 형성되던 모습, 또 미래의 '산복도로 르네상스'를 비롯해 부산시가 나아가야 할 모습이 아닐까.

부산시가 할 일은 공간을 일일이 메우는 게 아니다. 공동체를 위해, 도시 경관을 위해 좋은 원칙을 제시하고, 이걸 지켜내는 게 공공기관이 할 일이다. 20세기 개발 패러다임은 '현재'에 절대적 가치를 뒀다. 이젠 벗어나 보자. 해양도시의 핵심 공간을 무미건조한 아파트로 채우는 건 옳지 않다. 당장 활용할 수 없는 공간은 미래 가능성을 위해 비워두는 게 낫다. 나머지는 바바가 '수행성'이라고 부르고, 엘리멘탈이 '시간에 따른 동적(dynamic) 개발'이라고 부른, 시민의 점진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에 맡기는 거다.


# 호미 바바

- 인도 출신 미국 철학자
- '이질 문화 충돌과 혼성이
- 새로운 정체성 잉태' 주창

호미 바바 (Homi K. Bhabha·1949~·사진)는 인도 출신의 미국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들의 역사를 연구하며, 독창적인 문화이론을 제안했다. 하버드대 인문학연구소장이며, 올해 인도 정부로부터 최고 시민상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 상을 받았다.

그는 뭄바이에서 태어난 파시(Parsi) 교도이다. 파시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건너온 소수파 종교. 인도에서 '혼성화'되고 힌두교 풍습을 존중하지만, 여전히 조로아스터교의 일파로 종교적, 인종적 특색을 유지한다. 그러면서 인도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 이런 파시의 성격은 바바가 말한 혼종성(hybridity)을 보여준다.

각자의 '차이'를 바탕으로 문화적, 경제적 생활이 서로 부딪치고 협상하는 문화 혼성. 하나로 합쳐지며 사라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정이다. 또 특별한 현상이 아닌 보편적 현상이다. 세계 어디에도 '순수한' 문화는 없다. 제국주의 문화는 거꾸로 식민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문화 혼성은 지배 문화를 바꾸는 잠재력을 지닌다.

문화 혼성은 이민족 국가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한 도시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바바는 이처럼 이질적인 문화들이 도시와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는 양상이 기본적으로 갈등을 전제하면서도 창의성을 발휘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지훈 철학자·필로아트랩 대표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