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 펄잼, 사운드가든과 함께 '시애틀 4인방' 밴드로 불린 앨리스 인 체인스. 유니버설뮤직 제공

- 어둠 밝히려던 이성·합리성
- 그 자신 스스로 신화가 되어
- 더 강력한 어둠으로 기능

- 美 시애틀과 부산의 두 밴드
- 효율성 집착하는 현대인에
- 자신의 내면 주목을 권고

아스팔트 사이로도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어린싹 하나가 기어코 올라오는, 바야흐로 봄이다. 한창 마음 설렐 이 싱싱한 계절에,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자꾸 가을을 떠올리고 있다.

모든 생명이 탄생의 순간과 함께 이미 죽음을 배태하고, 강한 빛을 받는 존재일수록 그 그림자도 짙어지게 마련이니 봄의 역동 속에서 문득 가을을 떠올리는 것도 영 까닭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이치란 게 꼭 동전처럼 양면이 항시 공존하는 것일 텐데, 우리는 자주 이 당연한 이치를 까먹곤 한다. 동전에는 분명 양면이 있건만, 우리들 대부분은 평생을 숫자가 박혀 있는 앞면만 바라보다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명함에 박힌 직위나 연봉, 출신 학교나 나이처럼 숫자나 서열로 드러나는 정보가 없으면 '멘붕'이 되어 갈팡질팡하는 오늘날의 세상 물정. 특별히 '쓸모없음(無用)'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동전의 뒷면 따위를 유심히 볼 일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없을 것이다.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별' 볼 일조차 없이 사는 대다수 우리처럼 그렇게.

■빛에 대한 그림자의 반격, 1960년대와 '계몽의 변증법'

'어둠의 시대'라는 중세가 신의 시대였다면 근대 이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성의 시대랄 수 있다. 계몽주의가 영어 'Enlightenment'를 옮긴 것이니 이성은 다름 아닌 '빛'이다. 어둠의 시대를 밝힌 빛은 오늘날 우리들의 풍요와 진보에 큰 기여를 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빛에 대한 지나친 도취는 우리 안에 당연히 존재해야 할 건강한 어둠과 그림자마저 걷어내 버리고 사람들이 신경증이나 강박, 우울증이나 중독 중 하나쯤은 필수품처럼 여기며 살아가도록 만들어버렸다. 현대인은 24시간 달걀을 낳다 폐기처분되는 그 수많은 공장 안의 닭처럼 형광등 아래서 커피나 담배 등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각성시키며 약에 취한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그러는 사이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이성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유사 이래 가장 야만적인 일들을 벌여왔다.

이렇듯 과도하게 도취된 이성(빛)에 대한 반성은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서구를 중심으로 본격화됐는데 대표적으로 1947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쓴 '계몽의 변증법'을 들 수 있겠다. 어둠을 밝히려던 이성과 합리성이 그 자신 하나의 신화가 되어 오히려 더 강력한 어둠으로 기능하게 된 아이러니와 구조를 밝힘으로써 계몽의 신화를 통렬히 비판한 책이다. 1960년대 후반 출현한 히피들이나 유럽의 68혁명, 기계처럼 경직되고 획일화된 세계에 혼돈을 통해 충격을 주려던 사이키델릭 사조의 출현 등이 궤를 같이하는데 이들의 철학이나 태도에는 순진하고 과잉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삶을 맥도날드처럼 효율성의 논리로만 재단하는 시대에 대한 나름의 통찰과 반항은 역사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1990년대, '사슬에 묶인 앨리스'들의 시대

1990년대 초반은 대형화와 상업화의 경향이 극에 달하던 록음악계에 경종을 울리며 록음악 자체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이른바 '그런지 세대들'이 출현한 시기다. 미국 북부의 잿빛 도시 시애틀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이른바 '시애틀 4인방'이라 불리는 네 밴드가 그 주역이었는데 이들은 계산되고 전략적으로 소비되기 위해 생산되는 록음악이 아닌, 록음악 본연의 순수성을 갈구했다.

그중에서도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는 소비사회의 마취된 생기발랄함과는 거리가 먼 음울하기 짝이 없는 음악으로 당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여름을 제외하곤 언제나 비가 내리거나 흐린 잿빛 도시 시애틀의 정서를 그대로 담은 이들은 1990년 데뷔 앨범을 발매하자마자 세계적으로 수많은 마니아를 양산했다.

1960년대 히피들이 삶의 긍정과 환희, 사랑과 희망을 노래했다면 1990년대 그런지 세대는 그것을 순진한 생각으로 받아들이며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절망, 자조에 기반을 둔 말하자면 '자포자기의 미학'이라 표현할 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슬을 벗어던진 포효, '언체인드'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밀어붙이며 날이 갈수록 묵직하고 단단한 장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 밴드 '언체인드'의 2013년 싱글앨범 '호저(豪猪)'를 듣는다. '사슬을 벗어던진' 이란 의미의 밴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앨리스 인 체인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언체인드는 13년째 쉬지 않고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관록의 밴드다.

호저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가 있어 아무리 추워도 서로 붙어있을 수가 없는 딜레마를 가진 동물이다. 사회에 순응하고 대중들과 호흡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들의 속살과 분노, 고통과 외로움을 예쁘장하게 포장할 수만은 없는, 언체인드 자신들의 딜레마가 느껴지는 곡이다. 묵직한 연주와 때론 읊조리는 듯 때론 절규하듯 노래하는 보컬을 통해, 그들은 끊임없이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만 바라보려는 우리에게 각자 자신 안에 웅크리고 있을 어둠과 그림자에 주목해보라고 말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외부의 휘황찬란함,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사회의 속도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빛이 나쁜 것일 리는 없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완벽할 순 없으며 스스로 성찰과 긴장의 끈을 놓치면 타락하기 시작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 빛은 그림자와 함께 가고 달에 앞면이 있다면 뒷면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생기 가득한 봄날 문득 가을을 떠올리듯, 빛으로만 가득한 세상에 한 줌 그림자를 찾아 주목해보는 것. 역시 모순이야말로, 삶의 비의(秘意)가 아닌가 싶다.


# 앨리스 인 체인스 & 언체인드

앨리스 인 체인스는 너바나, 펄잼, 사운드가든과 함께 이른바 '시애틀 4인방' 밴드로 불리며 1990년대를 풍미했던 록밴드다. 묵직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를 기반으로 죽음과 약물, 인간의 절망과 외로움 등을 주로 노래했으며 우울과 어둠, 심연의 혼돈 등을 표현하는 데는 거의 독보적인 밴드로 인정받았다. 밴드의 간판이자 상징적 인물이었던 보컬 레인 스탠리가 2002년 4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2011년에는 베이시스트 마이크 스타 역시 44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새 멤버 윌리엄 듀발 등과 함께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언체인드는 2001년 김광일을 주축으로 부산에서 결성돼 올해로 13년째 활동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밴드이자 관록의 밴드다.

묵직하고 진지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연주와 고집스러운 장인과도 같은 태도,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 등으로 유명하며 2005년 미니앨범 'push me'를 발매했고 곧 발매될 정규 데뷔 앨범에 앞서 2013년 싱글 앨범 '호저'를 발매했다. 특별히 사교적이거나 자신들을 홍보하는데 열심이지 않아 융통성 없는 밴드라는 평가도 있지만, 한편으론 바로 그런 진지한 태도 때문에 여타 밴드와 구분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고수해 마니아 팬이 많은 밴드다.

사회학자·호밀밭 출판사 대표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