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겉모습이 변할지언정 약속이 담긴 삶의 이야기는 어제와 오늘의 나를 연결해준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르코 8,29)


생애전환기 건강검진 통지를 받던 날 잠시 멈칫했던 기억이 있다. 나이 듦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생애전환기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감 때문이었다. 신체의 시계는 전환기를 맞았으나 내 마음의 시계는 어느 지점에 머물고 있을까? 과거의 나는 깨끗이 떠나보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기 힘들다.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는 매 순간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파스카 영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20대가 되니 참 좋다. 30대가 되니 참 좋다. 40대가 되는 것도 좋고, 50대가 되는 것도 좋고, 60대가 되는 것도 좋고, 70대가 되니 더 좋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영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옛것을 떠나보내는 애통함과 동시에 매 순간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생명의 기쁨을 체험하기 때문이란다.

추억의 시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떠올린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10년 후 등나무 밑에서 만남을 제안하셨다. 순진한 초등학생들은 불과 10년 만에 얼굴이 바뀔 것을 걱정했던 것일까? 우리는 세 가지 덕목(정직, 용기, 겸손)을 하얀 쪽지에 적어 만나기로 약속했다. 매일 노트에 적은 후에야 숙제를 받아적을 수 있었던 '덕의 목록'은 4학년 1반의 정체성이었고 약속 지킴이의 표시였다.

삶 자체가 작동하는 이야기라고 보았던 폴 리쾨르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정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나는 신체적으로 변했고 도덕적으로도 변했지만, 약속이 담긴 삶의 이야기는 어제와 오늘의 나를 연결해준다. 결국, 얼굴에 주름이 생겨났고 신체의 시간은 20대와 분명히 다르지만, 여전히 나는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4학년 1반의 정체성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내 삶이 좋은 삶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리쾨르는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고, 닮고 싶은 모델이 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비전과 삶의 모델을 심어주는 물음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고 보니 정직, 용기, 겸손의 성품으로 사셨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나에겐 닮고 싶은 모델이었다. 숙제 노트의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도록 마음의 눈을 끊임없이 변침(變針)해주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의 초등학생은 이제 어느 곳을 향해 마음의 시계를 변침하는 중인가? 내가 닮고 싶은 분이라고 감히 소개하는 이 분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나 제자들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에 나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르코 8,29).

예수님이 약속하신 비전에 따라 삶의 시곗바늘을 맞추는 이는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자다.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닮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용기'를 청하며, '정직한' 마음으로 제자 되기를 바라는 자다. 왜냐면 "오늘도 시작이요 마침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세기도 주님의 것"이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 영혼의 변침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전환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님이시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 13,14-15). 그 제자는 2000년 전 스승의 이야기를 모델로 삼으면서도,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일어난 발씻김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또 다른 전환의 메시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