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이 메가폰을 잡은 '배트맨 비긴즈'는 영웅 신화의 전형적인 서사방식을 불어넣어 새로운 히어로의 부활을 알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가 있기 이전, '어둠의 기사' 배트맨의 인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도시의 어둠 속을 종횡하며 범죄에 맞서는 영웅의 활극은 일상적으로 위험에 노출된 소시민의 공포감과 맞닿아 큰 반향을 얻었다. 그러나 점차 현실적인 색채를 잃고 만화적인 공상의 세계로 일탈하면서 관객은 배트맨을 외면했다. 영화는 분명 상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매체이다. 하지만 영화에 몰입하려면 관객이 납득할 현실성과 박진감을 갖춰야 한다. '배트맨2'(1992) 이후의 실패들은 여기서 비롯한다.

영리하게도 놀란은 배트맨을 리얼리즘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했고, 만화의 아이콘을 현실의 고뇌와 불행에 빠진 인물로 재해석해냈다. 수호기사의 역할을 떠맡은 자기 희생적 영웅상. 팀 버튼이 '배트맨'(1989)에서 배트맨을 복수에 미친 일종의 정신병자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배트맨에 관한 놀란의 인간적 접근은 '다크 나이트'(2008)와 대형 서사극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시리즈의 기반이 되었다.

■여행과 귀환-영웅 서사의 전형

21세기 걸작 영화 반열에 오른 '어둠의 기사' 3부작 첫 작품인 '배트맨 비긴즈'는 영웅 신화의 전형적인 서사 방식을 따라간다. 브루스 웨인은 유년기에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를 안고 세계 각지를 방황하다 '어둠의 사도'라는 비밀 집단에 들어간다. 범죄와 싸우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익히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배트맨이 되어 고담시를 장악한 마피아 조직을 소탕한다. 중요한 건 이전의 배트맨 영화에서 빠져있던 성장과 여행의 모티브가 이 작품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신화학자 조셉 켐벨은 '천의 얼굴을 한 영웅'에서 영웅 신화의 표준적인 패턴을 '통찰의 탐색'(vision quest) 또는 '홍익(弘益)의 탐색'이라 했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 영웅은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 가치관, 능력을 갖추고 원래 속했던 세계로 돌아와 문제를 해결한다. 즉 영웅이란 무언가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서, 위험을 감수하고 변모의 기적을 겪고 사회에 이로운 무언가를 주려고 '돌아오는' 존재다. 테세우스와 오디세우스, 모세와 예수에 이르기까지 '여행과 귀환'은 거의 모든 영웅 서사의 공통된 플롯이다. '배트맨 비긴즈'의 브루스 웨인 역시 고전적 영웅들이 겪는 삶의 행로를 답습한다.

'배트맨 비긴즈'는 거물 마피아 두목 팔코네가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거듭나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딛고 홍익을 위해 싸우는 자경단원으로 변모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다룬다. 보통의 경우는 이 시점에서 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놀란은 범죄투사 자경단원으로서 정체성을 얻은 배트맨에게 또 다른 시련과 역할을 부여한다. 한때 그가 몸담고 있던 집단 '어둠의 사도'가 고담시를 파괴하기 위해 들이닥친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영웅 서사가 아닌 사회정치적 맥락의 문제로 넘어간다.

■21세기형 배트맨은 대테러 영웅

팀 버튼의 '배트맨'(1989)이 나온 이래 영화상에서 배트맨의 활동 영역은 고담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조커나 펭귄, 투 페이스와 같은 배트맨의 적은 도시 범죄가 낳은 일그러진 인간 군상이라는 점에서 엄연히 도시 내부에서 생겨난 존재였다. 그러나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고담시의 바깥세계에서 출현한 적 '어둠의 사도'가 도시로 침입한다. 티베트 밀교와 일본 닌자 집단의 외양을 결합한 것처럼 보이는,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의 색채를 지닌 이 비밀조직은 서구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타자로 등장한다.

라스 알굴이 이끄는 '어둠의 사도'들은 도시의 중심에 있는 웨인 타워를 노린다. 상수도에 환각제를 풀어 웨인타워를 향하는 전차에 초음파 발생기를 실어 보내면 도시 전체의 물이 일시에 증발하면서 환각 가스로 뒤덮인 무법천지를 만든다는 작전. 도시의 심장부이자 상징적인 건물을 공격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을 집단 공포에 빠뜨리고 혼란을 일으킨다는 '그림자 연맹'의 발상은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 가해진 테러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외부의 침입을 상정하면서 '배트맨 비긴즈'는 현실의 테러리즘을 은유화한다.

이 지점에서 배트맨은 공권력의 부족한 치안력을 보조하는 자경단을 넘어 테러리즘에 맞서는 적극적인 전쟁 영웅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시대가 달라지자 영웅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역할이 달라진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처음으로 고담시의 바깥 세계를 선보인 놀란은 '어둠의 사도'라는 악역을 통해 도시-국가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테러리즘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배트맨을 테러리즘의 공포에 맞서는 영웅으로 재정의한다. '어둠의 기사' 3부작이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웅 이면엔 시대의 그림자 깔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가 '여행'을 떠나 사회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가지고 '귀환'한다는 영웅 서사의 플롯을 반복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범죄 세계의 생리를 이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배트맨은 더는 범죄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어둠의 사도'의 실체를 알았기에 그에 맞설 수 있었다. 그는 '테러에 맞설 방법'을 가지고 고담시(미국)에 돌아온 것이다. 배트맨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고담시의 수호자로 우뚝 서는 여정은 9·11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극복하려는 미국에 고스란히 조응한다.

결국 '배트맨 비긴즈'는 테러리즘 이후 미국 사회의 정신적 외상을 영화에 반영했다. '외부로부터 발생한 적대적 타자의 침입(테러리즘)과 이에 맞서는 대테러 영웅'을 선보인 '배트맨 비긴즈'의 서사는 다른 영화들을 통해 거듭 반복 재생산됐다. 외계인의 뉴욕 공습을 그린 '어벤저스'(2012) 역시 '배트맨 비긴즈'가 깔아놓은 포석을 딛고 탄생한 셈이다.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한 시대의 문화적 텍스트를 분석해보면 그 시대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50년대 미국의 B급 SF 영화들은 외계인이나 괴물 같은 존재를 내세워 소련 공산주에 대한 공포를 은연중에 표현하거나, 성서에 기반을 둔 대형 서사극으로 권위적인 반공 영웅상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21세기 영화적 상징으로 슈퍼히어로가 꼽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영웅의 화려한 활약상 이면에는 영웅을 요청하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기 마련이다.


# 배트맨의 기원

배트맨은 1939년 만화가 밥 케인이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 처음 내세웠다. 초창기엔 과학자이자 탐정의 능력이 두드러졌으나 활동 배경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후 지금의 백만장자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86년 프랭크 밀러의 만화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1988년 출간된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는 현재 배트맨의 이미지를 정립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팀 버튼의 '배트맨'(1989)'의 바탕이 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트맨의 초창기 활약을 그린 '배트맨 이어원'에서 '배트맨 비긴즈'의 모티브를 일부 가져왔다. 올해는 배트맨 탄생 75주년으로 미국에서 이를 기념하는 각종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