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침묵 속에는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 사랑이 숨어있다.

"보라.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 죄목을 들어 고발하고 있는데 너는 할 말이 하나도 없느냐?"

(마르코 15,4)


내키지 않지만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억울하지만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자니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하고, 말을 안 하자니 억울하다. 그러나 알면서 침묵하는 동료에게는 배신감마저 든다. 그것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면 다행이지만, 교회 공동체와 사회전반에 죄악을 유발한 사건이라면 마음은 쓰라린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묻는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

'침묵(沈默)'은 그리스도교 박해를 다룬 엔도 가슈사쿠의 소설이다. 저자는 인간의 고통과 하느님의 부재라는 주제를 17세기 일본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풀어간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는가? 무기력한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한 번쯤 물어봤을 주제들을 다룬다.

포르투갈 선교사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페레이라 신부의 수제자인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도착하지만, 그들도 곧 잡히는 신세가 된다. 중반부를 넘어 소설은 배교를 설득하는 페레이라와 갈등하는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결국 로드리고도 성화상을 밟고 배교하였다. 배교는 죄인가? 가톨릭교회의 교리서는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완전히 의식하면서, 고의로 저지른 죄"를 대죄라고 가르친다(1857항). 두 사람 모두 배교했다. 그런데 소설은 두 사람에게 다른 평가를 유도하는 듯하다. 똑같이 성화상을 밟았지만, 똑같은 배교였는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엔도 가슈사쿠의 소설에서 하느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시다. 마커스 보그가 '새로 만난 하느님'에서 말했던 '관계모델'에 입각한 하느님이시다. 심판자로서 하느님이 아니라, 배반 때문에 소외된 제자를 위로하는 하느님이시다. "너는 내가 교우들을 외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 같이 고통받고 있었다." 소설은 성화상을 밟고 배교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주인공은 배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교의 순간에 체험한 것은 하느님 현존이다.

마르코 복음 14장은 잡혀가는 스승 예수와 거리를 두는 배신자 베드로의 모습이 그려진다. 신분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인간 베드로의 나약한 모습이다. 하지만 곧이어 불리한 증언 앞에서도 침묵하는 스승의 모습이 그려진다(15,4). 예수님의 침묵은 부활 이후에도 등장한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배반한 제자를 용서하며 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에는 어떤 단죄도 없다. 스승의 침묵 안에는 하느님 사랑이 담겨 있다.

엔도 가슈사쿠는 죄를 이렇게 표현했다.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내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잠시 되돌아보니, 이웃의 억울함에 침묵했던 흔적이 많다. 침묵해야할 순간에는 혀를 조심하지 않은 흔적도 가득하다. 망각하지 말아야할 흔적들을 나는 너무도 쉽게 잊고 살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의 침묵 속에서 이런 나를 기다려주셨다. 내가 새로 만난 하느님은 오늘도 세상과 구별된 사랑의 방법을 알려주시는 듯하다. 침묵하라! 그러나 사랑하라!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