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자물쇠를 채운다고 과연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국제신문 DB

오래전부터 책꽂이에 꽂혀있는 시집을 꺼내 보다가 낯익은 글씨체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이 시집 속에 시를 열심히 읽던 때의 내가 이토록 시인 같은 감성이었던가? 누군가의 시를 베껴놓은 듯 감성에 젖은 글을 읽으면서 슬쩍 시집을 내 방으로 들고왔다.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이해 못 할 것 같은 내용, 이해한다면 부끄러울 것 같은 생각에 이십여 년이 다 된 시집 속에 쓰인 글에 피식 웃어본다.

중학교 시절이던가? 당시 한창 사춘기였던 것 같다. 일기장을 하나 샀는데 자물쇠가 달려있었다. 무슨 엄청난 내용을 일기장에 적기라도 할 듯 하루에 몇 줄 글을 적어놓고는 이내 열쇠로 채우고 그 열쇠는 또 어딘가 숨겨놓는다고 머리를 쓰곤 했다. 그런데 그토록 꽁꽁 숨겨둔 열쇠로 일기장을 누가 열어본 것이다. 일기장을 열어본 이에 대한 배신감…. 그때부터 나에 대한 어떤 내용도 적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로 일기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세상엔 비밀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는 굳이 숨길 것이 없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친구끼리 새끼손가락 꼭 걸고 약속했다. 세상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나눈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손가락 꼭꼭 걸었던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친구에게 "이건 비밀이야"라면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친구와 손가락 걸고 복사하고 팩스까지 보냈던 그 의식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출가해서도 때로는 내가, 때로는 상대가, 마치 거대한(?) 비밀의 약속을 깨어버리는 듯한 만행을 서로 저지르게 되었다. "세상엔 비밀은 없어"라고 하면서 말이다.

범죄수사에서도 공범이라는 것을 조사하려고 대상자들을 각자 다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A에게 수사관은 "B가 너 혼자 했다고 하던데. 그렇게 자백을 했어"라고 말하면, A는 한참 고민하다 결국 실토하게 되는 장면을 영화나 TV에서 보게 된다.

이런 것을 놓고 뭐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보다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을까?"하고 말이다.

그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숨기고 싶은 일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이 아니고 그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일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이 저지른 거대한 범죄나 잘못을 덮기 위해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뇌물로 그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도 하지만 결국은 세상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정의롭게 얻지 않은 돈을 땅을 파고 묻어두고, 다른 방법으로 아무리 숨겨놓아도 언젠가는 발각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도 한다.

불교 경전에서는 옳지 못한 것으로 상대를 속이거나 숨긴다면, 그 업의 지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세상엔 비밀은 없다. 비밀을 굳이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숨기지 말고 깔끔하게 사는 일.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인정하고 솔직하게 사는 일. 그렇게 살면, 자신을 잘 지키는 것이 비밀을 만들고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보여서 더욱 좋고 더욱 깨끗한 개인, 사회,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

"세상에 비밀은 없다."

대운사 주지·복합문화공간 쿠무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