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제법 따갑게 느껴지는 오후,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에 놓인 평상에서 할머니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시원한 나무 그늘이 평상을 덮고도 넉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시골마을 정자나무에 못지않은 푸근함을 전해주는 나무, 벚나무이다. 벚꽃은 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고마운 나무이다.

이른 봄 돋아난 어린 연두색 잎이 점점 짙어가는 걸 보면 '시간'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연두에서 연록으로, 녹색으로, 검푸른 짙은 녹음으로 익어가는 시간은 느리다. 그리고 정확하다. 달력이나 시계가 없어도 그 시간이 보인다. 수십 년, 수백 년을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식물도감은 학문적 용어로 지식만 전해준다. 머리만 복잡하고, 책을 덮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도 별로 없다. 내가 공부할 자세가 안되어 있는 탓이다.

고주환 씨의 '나무가 민중이다'를 보았을 때, 비로소 내가 찾던 책을 만난 기분이었다.

고주환 씨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 있는 성황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치악산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성황림은 면적 31만2993㎡, 온대지방을 대표할 만한 활엽수림이다. 1962년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됐다. 성황림에서 대를 이어 농사를 지으며 목수 일을 하는 부모님의 늦둥이로 태어난 저자는 나무와 풀과 함께 자랐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나무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 그리고 어머니와 주변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 자라는 동안 많은 체험으로 얻은 풀과 나무의 갖가지 생활 상식과 민담은 그의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새겨졌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출판사 사장은 "듣도 보도 못한 나무이야기를 써주세요!"라고 주문했다. 그의 몸과 마음에 새겨졌던 이야기가 풀려나와 싹이 돋고, 꽃이 피고, 단풍이 들고, 책이 되었다. 강원도 영서지방 구전 민속의 구성진 내용들도 더해졌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이나 식물학 서적 등에서 봤던 글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무와 풀들이 어떤 모습으로 함께 했는지 옛이야기처럼 펼쳐진다. 이 책에 '듣보잡 풀과 나무의 이야기'라는 별칭이 붙은 건 그런 까닭에서다.

농기구를 만들었던 물푸레 나무, 가난한 민초들에게 응급약이었던 질경이, 나무 중에서 가장 단단해 생활도구는 물론 포졸들의 육모방망이가 되었던 박달나무, 밀가루 반죽을 올려놓고 미는 '안반'이 된 피나무…. 나무와 풀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았음을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정겨운 책이다. 마치 성황림의 한 가운데 서있는 듯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져 기분 좋은 책이다.

오래전 겨울, 여행길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가로수가 '누구'인지 몰라 묻는 나에게 선배 한 분이 이런 말로 답해줬다. "네가 대학 다닐 때 가장 많이 본 나무"라고. 정답은 벚나무였다.

꽃도, 잎도 없이 서있는 그 나무를 내가 몰라봤던 것이다. 나는 꽃이 지고 잎이 진 뒤에도 그 나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러자면 그 나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우리 곁에 있는 나무와 풀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