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배우·극작가인 부산 태생 김해운
- 연해주·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 오가며
- 고려인극장 창설·문화 중흥시킨 멤버로
- 항일연극 '동북선' '생활' 등 여러 편 써

- 재소고려인 전문가 김병학 시인
-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24년 간 살며
- 고려인이 부른 창작·구전노래 4년 연구
- 600여 곡의 악보·가사·해설 담아내

'고려인'은 한민족의 기구하고 아픈 운명을, 그런 운명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맞서 살아낸 얼을 함께 상징하는 존재다. 우리 민족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건 1864년쯤이라 한다. 처음에는 14가구 65명이 두만강을 건넜다. 행렬은 급격히 불어났다. 가난했고, 나라 힘이 약했던 탓에 이들은 살길을 찾아 나섰다.

젊은 날의 김해운(오른쪽)이 아내이자 유명한 고려인 연극인 송 따찌야나와 함께 '농민유희'라는 작품에서 춤추고 있다.

1937년 8월, 공산주의 소련을 지배하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한민족을 모조리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 그 숫자가 17만2000명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혹독하게 탄압받고, 다치거나 숨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졸지에 살던 곳에서 수천㎞ 떨어진 중앙아시아 거친 땅에 내던져졌다. 그래도 살아야 했고, 살아남았다. 고려인은 강하고 슬기로웠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척박한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로 이주당하고도 이웃을 챙기고, 마을을 이루며 옛 소련 소수 민족 가운데 잘 살기로 이름이 났다. 부지런하고 지혜가 많아 벼농사 북방한계선을 북쪽으로 끌어올린 이들이 고려인이라고도 한다.

고려인이 역경 속에서 삶을 개척하며 한민족 공동체를 지킨 데는 문화의 힘, 예술의 힘이 컸다. 강제 이주당하기 전이나 뒤나 고려인은 삶터에 극장을 세워 춘향전과 심청전을 올렸고, 한글 신문을 냈다. 올해는 연해주 고려인 사회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즈음 광주광역시에 사는 김병학 시인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문화와 예술과 삶에 관해 그는 최고 수준의 전문가이다. 둘째, 그는 최근 '김해운 희곡집'(숭실대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총서·학고방 펴냄)을 엮어 펴냈다.

■한민족의 얼, 문화로 지키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뤼스끌로보 묘역에 모셔진 김해운과 아내 송 따찌야나의 묘.

지난달 말 광주 전남대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1965년생인 김병학 시인은 1992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27세 때였다. 고려인 말고는 카자흐스탄에 '한국인'이라고는 없을 때였다. 그리고 지난해까지 24년을 꼬박 살았다. 카자흐스탄 한글학교 교사, 고려인신문 '고려일보' 기자,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 소장 등으로 활동한 그는 2007년 기념비적인 책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전2권·고려인 한 야꼬브와 공저·화남출판사)를 냈다.

현지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 60년 치(1938~2004년)를 뒤지고, 자료 찾고, 동포를 인터뷰해 4년 매달린 끝에 완성한 이 책에는 재소고려인이 불렀던 우리 창작 노래와 구전 노래 600여 곡의 악보, 가사, 해설이 빼곡하다. '한진 전집' '경천아일록'(연해주 항일운동가 김경천 장군 일대기)도 편찬했다. 카자흐스탄 시문학을 번역해 소개했고, 자신의 에세이집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와 시집 '천산에 올라' 등도 냈다.

지난해 말 카자흐스탄의 삶을 마무리하고 귀국한 그가 강제 이주 80주년이라는 계기를 놓칠세라 내놓은 책이 '김해운 희곡집'이다. 연극배우이며 극작가였던 김해운(1909~1981)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회를 오가며 고려인 극장을 창설하거나 중흥시키고, 한민족 동포를 울리고 웃긴 탁월한 예술가였다. 그간 고려인 예술가를 조명하는 저작이 꾸준히 나왔지만, 유독 김해운은 빠져 있었다. 그는 부산 태생이다.

김해운이 희곡을 쓴 항일 연극 '동북선'이 연해주 해삼시에서 공연됨을 알리는 고려인 신문 '선봉' 1935년 4월 18일 자 광고. 김병학 시인 제공

김병학 시인이 말했다. "굉장한 배우이자 극작가였죠!" 1935년 9월 연해주에 있던 '원동 고려인극장'은 '춘향전'(연성용 연출)을 제작해 공연한다. 고려인 동포사회가 드디어 민족 고전을 무대에 올린 뜻깊은 일이었다. 김해운은 방자 역할을 맡는다. 이때부터 '춘향전'은 오랜 세월 인기 속에 공연되고 김해운은 방자로 계속 나온다.

1939년 창설된 타슈켄트 조선극장에서 '춘향전'이 공연될 때면 고려인들은 "춘향전 보러 간다" 하지 않고 "방자 보러 다닌다"고 했을 만큼 그의 연기는 실감났다. 김해운은 1940년대 항일 연극 '동북선'과 '생활' '무죄인들의 노래' '기후조' 등 희곡도 여러 편 썼다. '동북선'에 나온 노래를 지금도 고려인 어르신들이 기억해 부를 정도로 그는 탁월했고, 인기 높았다.

■국내 고려인 동포의 처지

김병학 시인이 '김해운 희곡집'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해운은 고려인 사회의 문화 대들보였던 고려극장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다. 1932년 연해주의 '원동 고려인극장'과 1939년 '타쉬켄트 조선인극장' 창단을 그는 주도했다. 타쉬켄트 조선인극장이 1950년 해체되자, 머나먼 사할린으로 건너가 '사할린 조선극장'을 중흥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랬다가 말년인 1976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와 고려인의 문화예술 활동을 돕는다. 1909년 부산에서 태어나 10살 남짓할 때 연해주로 건너간 그의 삶은 줄곧 거대하게 출렁댔다.

김병학 시인은 '김해운 희곡집'에 쓴 '해제'에서 이런 내용을 상세히 밝혔다. 들으면 들을수록, 지금의 한국인이 잊어서는 안 될 고마운 삶이었다. 나라 힘이 약해 떠돌고 떠돈 삶을 살면서도 한민족의 예술과 문화를 놓지 않았던 고려인 동포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날 인터뷰가 끝나자, 김병학 시인은 광주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 마을'로 갔다. 일하고 돈을 벌고자 잘 사는 '모국'으로 찾아든 고려인 동포들이 약 4000명 모여 사는 곳이다. 고려인 3세가 중심인 이곳 고려인 동포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고려인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고,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 청소년문화센터, 상담센터 등을 갖추고 산다.

고려인마을을 만들고 키운 주역 이천영 목사(새날학교 교장)는 "고려인 동포 지원 체계가 미흡하다. 그 탓에 국내에서 일하는 3만5000여 명 고려인의 자녀(고려인 4세 또는 5세)는 만18세가 되면 추방된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도 많은데 18세가 되면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추방돼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처지를 개선하려고 고려인 지원 특별법 제정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문득,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과연 이런 상황은 합당한가? 김해운을 떠올렸다. 우리는 강제 이주 80년 역사를 어떻게 되새겨야 할까?.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