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노무현 정부 외교 경험
-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 회고록
- 美·中 패권다툼·북핵 문제 사이
- 현실적·균형적인 전략 엿보여

한반도 전쟁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았던 시기로 1994년의 북핵 위기를 꼽는다.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탈퇴했다. 동시에 핵무기 개발의 길로 황급히 들어선다는 신호를 국제사회에 보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이에 대응하여 북한을 선제 타격한다는 예측과 정보가 난무했다.

	2003년 10월 한승주 당시 주미대사(가운데)가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안보보좌관(왼쪽),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있다. 올림 제공

이때의 강도 높은 전쟁위기설은 '미국이 실제로 북한 공습 직전 단계까지 갔는데, 한국 정부(또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가 사력을 다해 이를 막았다'는 요지의 후일담을 낳았다. 이런 후일담은 세월이 지나면서 일종의 '정설'이 되어간 경향이 있다.

당시 긴박했던 외교 현장 한가운데서 한국의 대응을 진두지휘했던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은 최근 펴낸 회고록 외교의 길에서 그 상황을 조금 달리 기록한다. 그때 미국 국방장관이던 윌리엄 페리와 미국 외교안보 당사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 정부가 북한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정하는 단계까지는 간 일이 없고, 실제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도 되지 않은 상태"(105쪽)였다. 한 전 장관과 절친했던 페리의 말로 표현하면 "컨틴전시 플랜(긴급사태 대책)은 내 책상 서랍에는 있었지만,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책상 위에 꺼내놓은 것도 아닌" 상태였다.

한 전 장관은 '한국이 미국을 만류해 북한 공격을 막았다'는 해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을) 김영삼 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미국을 만류하려 노력을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크게 그리고 세밀하게 보면 '한국이 막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과장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외교인 한승주'의 절묘한 현실감각과 균형감을 느낄 수 있는데, 실은 그의 회고록 '외교의 길' 전체에 시종일관 이같은 현실감각과 균형감을 저자가 외교 현장에서 구현한 일화가 많다.

1990년대 초반 미국 시사 잡지로 영어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한승주 교수'를 지면에서 만났을 수 있다. 그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뉴스위크'에 고정 기명 칼럼을 썼다. '뉴스위크'는 '타임'과 동급의 영향력을 가진 시사주간지였고, 한국인이 여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시로는 드문 일이었다.

그는 평생 외교학자로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삶을 살면서도, 김영삼 정부 초대 외무부 장관과 노무현 정부 초대 주미대사를 각각 22개월씩 맡는 경험을 했다. '외교의 길'은 외교학자이자 외교관으로서 그가 준비하고 계획하고 겪고 느낀 것을 높은 밀도로 기록한 회고록이다. 외교에 관한 그의 원칙과 철학은 실용주의다. 실용주의란 '형편 봐가며 그때그때 이득을 챙기자'는 식의 질 낮은 실용이 아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불안해서라도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할지 갈피도 못 잡는다. 전략과 현안 장악력이 강력해야만 협상도 하고 양보도 하고 '고집'도 부릴 수 있다. 그것이 실용이며 이는 절묘한 현실감각과 균형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한 전 장관의 '외교의 길'에는 이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 많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