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에는 범할 수 없는 초록의 혼이 있다

우포는 수십만 평의 그 혼의 영토이다

생명의 여인숙 같은 이곳엔 거절이 없다

- 이우걸 시인 <늪> 中

	(사진=KBS)

뭍과 물이 오랜 세월 만나 일궈낸 생명의 땅

경상남도 창녕 ‘우포늪’의 생태 대서사시

초록빛 가시연이 늪을 뒤덮을 때면

가시연잎 위아래로 생명길이 열린다

윗집에서는 물꿩과 쇠물닭이 뛰놀고

아랫집에서는 참붕어와 가물치가 헤엄치는

생명의 습지 우포늪을 바라보다

	(사진=KBS)

◆ 자연이 만든 거대한 생명의 땅

물에 젖은 비옥한 땅이자 생물다양성의 산실, 거대한 내륙습지 경상남도 창녕 우포늪에는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산다. 90종의 새, 42종의 물고기, 153종의 곤충과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까지, 우포늪은 자신을 낮춰 이들 모두를 보듬는다. 3대째 고기를 잡고 있는 박한덕 씨와 이륜차를 타고 우포늪을 누비는 환경감시원 주영학 씨 그리고 매일 새벽 우포의 산책길을 걸으며 동물들과 교감하는 이인식 씨와 늪의 상류에서 고둥을 채취하는 임봉순 할머니… 이들 모두가 습지와 더불어 산다. 지구에서 가장 생명 부양력이 높은 생태계는 늪이다. 우포늪은 1998년 3월 2일 람사르 협약에 보호습지로 등록되었다. 만 20년이 되는 올해 우포늪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사진=KBS)

◆ 가시연이 피워낸 초록의 영토

백년에 한번 피어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보기 드문 가시연꽃,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덕에 우포늪은 4년 만에 가시연을 품었다. 5월부터 어린잎이 피어나 한여름 초록의 영토로 장관을 연출하고 가을 씨방이 터져 씨앗의 여행을 떠날 때까지 가시연은 제 일생을 바쳐 우포늪의 집이 된다. 넓은 잎은 물꿩과 쇠물닭의 둥지가 되고 뿌리부터 꽃대까지 뒤덮은 뾰족한 가시 사이마다 작은 곤충들이 몸을 숨긴다. 가시연 그늘 아래에서는 물고기들이 산란하고, 물꿩과 쇠물닭은 가시연잎을 밟고 노닐며 스며드는 물길의 고기를 잡아먹는다. 생명을 보듬는 늪의 초록 땅 가시연의 일생을 들여다본다.

	(사진=KBS)

◆ 가시연을 집으로 새 생명을 품는 물꿩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이제는 여름 우포늪을 찾는 귀한 손님 물꿩, 일부다처제의 삶을 사는 물꿩은 암컷이 알을 낳기만 하고, 정작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우는 것은 모두 수컷의 몫이다. 수컷은 알을 지키기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 틈틈이 이사를 다니고 폭우가 쏟아져도 끝까지 알을 지킨다. 태어나자마자 아빠의 깃털 속으로 파고드는 습성이 있는 물꿩 새끼들, 자기만큼 다 큰 새끼들을 끝까지 보듬는 아빠 물꿩에게는 애타는 부정이 있다. 여름동안 몸을 부대끼며 키운 새끼들을 데리고 떠나는 물꿩의 화려한 비상을 바라본다.

	(사진=KBS)

◆ 가시연 씨앗의 물길여행

가시연잎 구멍 사이로 햇빛이 비치면 늪 수면 아래 감춰진 놀라운 세상이 드러난다. 가시연잎 아래에서 붕어와 잉어 가물치가 노닐고, 참붕어가 가시연 씨앗으로 공놀이를 한다. 물속 작은 생명이 가시연 씨방을 쪼고, 터진 씨방에서 쏟아져 나온 빨간 씨앗들은 물길을 따라 멀리 퍼져나간다. 고귀한 자태를 다시 뽐낼 미래를 기약하며 떠나는 씨앗의 여정을 감상한다.

◆ 우포늪 초록의 기억

여름이 지나고 가시연이 수명이 다하면 겨울 철새가 찾아오고 어부는 얼음을 밀어내며 노를 젓는다. 철새들이 남아있던 수초를 갉아먹으면서 우포늪은 서서히 초록의 영토에서 갈색 물로 잠겨든다. 그러나 겨우내 잠들어 있던 가시연 씨앗들은 이내 싹을 틔워 우포늪에 생명의 집을 만들 것이다. 다시 여름이 오면 가시연의 초록빛이 찾아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어부는 우포늪의 물길에 배를 띄운다.

권영미 기자 kym8505@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