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英 아티스트 그레이슨 페리 발간
- ‘오리무중’ 동시대 미술 입문서
- 개별 작품들의 뻔한 해석 대신
- 큐레이터 뇌구조·예술가 속내
- 8개의 테스트 통한 감상법 제시

영국에서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은 터너상(Turner Prize)이다. 터너상 수상을 다룬 뉴스에는 늘 ‘논란이 되는’ ‘도발적인’이란 문구가 따른다. 2003년 영국의 터너상 수상식 앞에는 가면을 쓴 시위대가 등장했는데 그레이슨 페리의 수상과 개념 미술을 반대하는 전통 예술가들로 밝혀졌다. 페리는 아동학대, 매춘, 전쟁, 성폭력 등과 같은 장면을 도자기에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자기와 태피스트리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영국 아티스트이자 여성 드레스를 즐겨 입는 ‘크로스 드레서’로 알려진 그레이슨 페리가 동시대 미술(현대미술) 입문서를 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저자 본인이 ‘동시대 미술’이라는 모호하고 현학적인 주제를 해설한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사람들이 미술관에 갈 때 떠올릴 만한 기본적인 질문들, 그러나 그런 걸 묻는다면 너무 무식해 보일까 봐 대개는 못 묻고 넘어가는 질문들을 이 책에서 던지고서 그에 답하고 싶다”고 밝혔다.

책에 따르면 현대는 모든 것이 미술이 될 수 있는 시대, 달리 표현하면 미술이라는 경계가 사라져 버린 시대다. 이미 50여 년 전에 ‘똥’도 미술이 되었고, 지금은 컴퓨터 프로그램도 미술이 되는 시대다. 예술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끼어들고 표현 방식의 한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보통의 감상자들에게 동시대 미술은 오리무중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동시대 미술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책은 개별 작품 속으로 들어가 설명하는 대신, 동시대 미술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와 예술가들의 속마음을 알리는 데 집중한다. ‘큐레이터의 뇌 구조로 본 미술관 내부도’, ‘예술의 가치 측정기’ 등 저자 특유의 예리하고 위트 넘치는 일러스트레이션도 곁들였다.

그렇더라도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가르는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예술의 경계선 때리기’라고 부르는 여덟 가지 테스트 기법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먼저 ‘그것은 갤러리 혹은 예술의 맥락 속에 있는가’라는 게 있다. 뒤샹의 소변기의 경우 배수관에 연결하지 않고 갤러리에 가져다 놓았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이 됐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것은 예술가가 만든 것인가’이다.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예술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예술가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예술을 하려면 예술가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쓰레기 하치장 테스트’도 있다. 테스트 대상인 예술작품을 쓰레기 하치장에 두었을 때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왜 예술품이 버려져 있는지 궁금해하는 경우에만 그것은 예술 작품의 자격을 갖춘 것이 된다는 뜻이다.

결론은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고 누구나 예술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감상자들에게 동시대 미술이라는 모호한 세계를 꿰뚫는 눈을, 현역 예술가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의 느낌 그리고 경력을 만드는 팁을 알려준다. 정홍주 기자 hjeye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