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0년간 동면 뒤 살아난 이끼
- 물 부족에 성장 조절하는 선인장
- 어떤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진화
- 미친 적응력 발휘한 31종 다뤄

식물이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니까 동물이 활동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식물이야말로 지구상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열정적이며 획기적인 존재이다. 식물은 끝내 진화하여 살아남는다.

변경주선인장을 그린 전태형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왼쪽)과 변경주선인장 실물 사진. 다른 제공

김진옥 소지현 두 저자는 식물학자이다. 지구 46억 년 역사 속에서 ‘기발한 아이디어’ ‘미친 적응력’을 발휘한 극한 식물을 ‘극한 식물의 세계’에서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책에는 ‘크기 속도 힘 환경 시간’을 주제로 31종의 극한 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외국의 낯설고 신기한 식물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사는 친숙한 식물도 등장해 더 반갑다. 강렬한 일러스트와 실물사진도 비교하며 볼 만하다,

책 속 한 대목부터 소개한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최소 1530년 동안 빙하 아래에 잠들어 있던 이끼가 휴면을 깨고 살아난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무려 천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남극 이끼는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식물입니다.” 1530년이라면 인간의 나라가 몇 개는 세워졌다가 망했을 세월이다. 여건이 맞지 않으면 싹을 틔우지 않고 잠자면서 기다리는 식물은 남극 이끼 말고도 있다.

어떤 꽃은 악취로 멀리 있는 곤충을 유혹한다. 스스로 열을 내어 주변 얼음을 녹이는 식물도 있고, 마하의 속도로 날아가는 씨앗도 있다. 생존하기 위해 진화하고, 후손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성실한 곤충에게 교묘히 사기를 치며, 또 다른 식물의 숨통을 졸라 죽이는 악랄한 방식도 쓴다. 먼지 같은 크기, 기나긴 휴면, 기계를 뛰어넘는 구조, 극강의 맹독성까지, 어떻게 저런 방식을 생각해냈는지 묻고 싶을 정도다. 타고난 능력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남김없이 활용하며 살아남는 식물의 세계는 신비롭다.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이다. 지금까지 이 꽃의 최대 크기는 지름 1.1m이며, 무게는 11㎏이다. 잎도, 줄기도, 심지어 뿌리도 없이 그저 땅바닥에 거대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게 전부인 식물이다. 며칠 만에 사라지는데 그 전에 꽃가루를 옮겨 줄 파리와 딱정벌레를 불러 모아야 한다. 썩은 고기 냄새가 이 꽃이 곤충에게 보내는 유혹이다.

가장 느리게 자라는 식물은 ‘변경주선인장’이다. 미국 남서부 지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 걸쳐 있는 소노라 사막에서 자란다. 서부영화 배경으로 자주 나오는 지역이다. 변경주선인장은 씨앗으로만 번식하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와 자라는 2년간은 키가 1㎝가 안 된다. 8년을 자라면 3㎝ 정도, 30~35년 자라야 5ｍ가 되며, 75~100년을 자라야 비로소 기둥 하나였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온다. 보통 150년 넘게 살며, 12ｍ 넘게 자란다. 척박한 사막에서, 왜 그렇게 천천히 자라고 덩치를 키울까. 사막에서 살아남자면 큰 물탱크가 필요하다.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천천히 자랄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변경주선인장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식물 ‘피마자’는 가장 유독한 식물이다. 피마자 씨앗에 있는 ‘리신(ricin)’이 독의 실체이며 생물무기금지협약 규제 목록에 올라 있다. 과거 1차, 2차 세계대전 당시 리신을 무기화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했고, 암살사건에 쓰이기도 했다. 피마자 씨앗이 독을 품고 있는 것은 동물한테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독이 있으니까 멀리 해야 할 것 같지만, 피마자는 인간에게 선택받는다. 다른 식물 씨앗보다 많은 기름을 추출할 수 있으며, 리신은 기름에 녹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피마자유는 많은 분야에서 쓰인다.

식물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 동물의 세계보다 더 역동적이다. 그럴 줄 알았다. 사방천지를 분주하게 다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보다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가 더 오래 사는 이유가 있었다. 극한 식물은 지금도 생존을 위한 진화 프로그램을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