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학도로 미학 전공 택한 고유섭
- 미술탐구 매진했지만 39세 타계
- 조선 ‘무기교’‘구수한 맛’ 등 표현
- 후배가 기록한 짧고 치열했던 삶

그간 접한 한국·중국·일본의 전통 기와 건물을 떠올려본다. 중국 전통 기와 건물은 화려하고, 과시하는 태도를 별로 숨기지 않으며 하늘로 치솟는 기운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안정감과 주어진 틀을 잘 지키는 느낌을 주되 상승 미나 운동감은 그다지 뿜지 않았다. 한국은 화려함을 즐기지 않고 단출·소박한 인상인데, 사뿐한 운동감과 상승 미를 어떻게든 표현한다. 한국의 미감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곧잘 했다.

1941년 개성의 유지들과 함께한 경주 여행 때 찍은 사진. 맨 왼쪽이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오른쪽 두 번째는 우현의 제자 황수영 선생. 황호종 교수 제공. 한길사 제공

전통 건축만 그렇겠는가. 한·중·일의 전통 회화·도자·탑·정원·춤을 봐도, 서로 공유하는 보편성의 바탕 위에 각자의 특수성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각 나라·민족·공동체를 표출하는 ‘미(美)의 원리’는 있는 걸까? 이렇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있다! 그렇다면 그 원리는 뭘까? 미감 또는 예술에는 한 공동체(민족·나라 등)의 역사·문화·체험·심성이 녹아 있고 쌓여 있다. 그러니 예술미의 원리나 특징을 파고들면, 그 대상을 더 잘 알 수 있다. 특히 ‘K-컬처’가 세계 곳곳 수많은 나라에서 큰 관심을 끄는 요즘 우리에겐 이 일이 더욱 필요하다.

삼일절이다. 일제의 압제를 물리치려고 선조가 105년 전 함께 일어나 항쟁한 날이다. 예술과 문화, 특히 미술사와 미학 영역에서도 ‘독립’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남보다 먼저 깨우치고 일어나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분이 있다. 인천이 고향인 이원규 소설가가 ‘고유섭 평전’을 최근 펴냈다. 부제는 ‘한국미술사의 선구자’다. 미술사가이며 미학자인 우현 고유섭(1905~1944)의 삶과 공부와 활약을 치열하고도 차분한 필치로 담아낸 평전이다.

‘구수한 큰맛’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문구가 익숙한 분도 꽤 있을 터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이 삶의 어느 순간 정리한 한국 전통 예술미의 특징이다.

“조선 미술의 성격을 몇 낱으로 분석해 보면 … 둘째는 구수한 특질이다. 구수하다는 것은 순박(淳朴)·순후(淳厚)한 것에서 오는 큰 맛(大美)이요, 예리함·규각(圭角, 귀퉁이가 뾰족함)·표열(漂冽, 차디참)에서 오지 않는다. 심도는 온축(蘊蓄, 깊이 쌓인 맛)한 맛, 질속(疾速, 몹시 빠름)과 반대되는 완만함이다. … 질박·담소(淡素), 무기교의 기교라야 한다.”(400쪽) 1940년 우현 고유섭이 조선일보에 쓴 ‘조선 미술문화의 낱 성격’ 한 대목이다.

지금 사람은 이 의견에 공감할 수도 있고,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 ‘고유섭 평전’에서 고유섭의 고향 후배인 이원규 작가는 ‘우현을 숭배하라’가 아니라 ‘고유섭의 삶은 이러했다고 자세히 보여주는 데’ 큰 힘을 쓴다. 열심히 취재하고 조사한 흔적이 그득하다. 평전 쓰는 일에는 이토록 치열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우현 고유섭은 1905년 개항장 인천에서 태어났다. 살림에 여유가 있고 “문화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내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제강점기, 탁월한 예술가를 숱하게 배출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당대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경성제대에 1925년 입학했다. 우현은 그때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미학 전공을 택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우현과 친했던 국어학자 이희승(1897~1989) 선생은 오래전 이렇게 썼다. “경성제대 역사 20년을 통해 미학 전공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135쪽) 한 명은 우현, 한 명은 일본인이었다.

28세에 개성부립박물관장을 맡으며 엄청나게 읽고 부지런히 답사하고 치열하게 쓰고 한국 미를 탐구한 고유섭의 짧은 삶이 촘촘히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