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포·동래 온천·중구 원도심 등
- 1928년 부산 배경 기괴한 사건
- 집요히 파고드는 쫀쫀한 이야기
- 시대·역사 대한 문제의식도 담아

- 장르 경계가 없다는 뜻의 필명
- ‘제2의 김성종’ 나온듯한 강렬함

“당신은 탐정입니까? 내 물음에 센다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이야기를 듣길 좋아하고 이야기의 진짜 모습을 탐구하길 즐기는 사람일 뿐입니다.” (153쪽) “다른 이의 이야기 듣는 게 좋았다. 꼬여 있는 이야기를 풀어 제 모습을 찾는 게 좋았다.” (275쪽) 작가 무경(無境)이 최근 펴낸 장편소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1928, 부산’(나비클럽) 주인공 천연주를 설명하는 문장은 ‘이야기’와 강력히 이어져 있다. 천연주의 일본식 이름이 ‘센다 아카네’이다.

무경 작가. 최근 장편소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를 냈다. 나비클럽 제공

이 대목을 접하자, 이야기에 관한 문구가 두 개 떠올랐다. “사실을 말하면 내가 배우겠다. 진실을 말하면 내가 믿겠다. 스토리를 들려주면 그게 내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아메리칸 원주민 속담) “스토리텔러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world is the storyteller.”(스티브 잡스, 두 문장 모두 이미도 작가의 ‘불멸의 키워드 상영관’에서 재인용.)

무경 작가는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사진)’ 책날개에 쓴 자기소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작가’라는 말보다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자의 행보를 걷고 있다.”

이 장편소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부산을 무대로, 젊고 창백하며 부유한(아버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조선 최고 갑부다) 여성 천연주(센다 아카네·마담 흑조)가 펼치는 활약을, 기담(奇談)·추리·탐정 소설 얼개로 풀어놓는, 연작 모음이다. 부산에 살며 활동하는데, 부산 문단에선 아직 낯선 젊은 작가 무경은 일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그다음 대목이 궁금해 자꾸 신경이 쓰여 쭉 이어서 읽게 된다.’ ‘추리·탐정·기담을 섞고 엮으면서 시대·역사에 관한 문제의식도 붙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기다 문득, 부산에서 활동하는 한국 추리소설 거장 김성종 작가 직계 후배가 나온 듯한 느낌도 받았다. 작가의 자기소개를 더 살펴보자.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고 있다.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장르의 경계가 없다는 뜻에서 무경(無境)이라는 필명을 쓴다. 좋은 이야기는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이야기 한 줄에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 시리즈를 썼다. 2023 ‘계간 미스터리’ 가을호에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로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악마 연작 단편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를 발표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세 편은 모조리 1928년 부산이 무대다. ‘마담 흑조는 매구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구포에서 여우를 매개로 벌어진 기괴한 사건을 천연주 일행이 풀어간다. 일제강점기 번창한 구포 장시 모습을 또박또박 되살리며 구포 상인의 기상,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절묘하게 표현했다.

‘마담 흑조는 감춰진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부산 동래온천(일본어 발음 ‘후잔’의 ‘토라이’온천)으로 옮긴다. 앞선 작품이 기담이 추리와 만나는 성격이라면, 이 작품은 추리가 원톱이다. 품격 있는 온천여관 스미레장에서 일본 여성이 별안간 죽는다. 그 실마리를 잡고 끝까지 가보니 뜻밖에 돈 밝히는 깍쟁이로 보였던 조선인 여관 주인의 새 면모가 툭 튀어나온다.

‘마담 흑조는 지나간 흔적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현재 부산 중구·동구 원도심인 장수통·부산역 등지에 추격전까지 펼치며 탄탄한 구성과 서스펜스를 보인다. 작가는 후기에서 당시 부산 자료를 제공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