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13일 부산 동래읍성 일대에서는 동래읍성 역사축제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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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투구(왼쪽)와 이 투구에 새겨진 글씨 東萊鎭(동래진).
부산박물관 제공 |
올해 30회를 맞은 동래읍성 역사축제는 동래구의 문화유산인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많은 시민이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즐기는 행사다. 축제를 잘 즐기셨다면 동래읍성에 잠든 우리 선조의 역사를 좀 더 되새겨보면 어떨까. 바로 430년 전 벌어진 동래성전투 이야기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동래읍성은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임진왜란 뒤로 폐허가 되었다가 18세기에 동래부사 정언섭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복천박물관 주변과 뒷산인 마안산을 따라 조선 후기에 축성된 성벽과 문루 등이 복원되어 있다.
후대의 그림이나 역사책에서 간접적으로 알려졌던 임진왜란 동래성전투는 2005년 동래읍성 해자(垓字)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해자는 성곽 주변에 땅을 파서 인공 하천을 만들거나 자연 하천을 이용하여 적의 접근을 막는 방어시설을 말한다.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읍성 바깥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어 언제나 물이 흐르게 하고, 바닥에는 뾰족한 나무를 박아 넣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해자 내부에서는 동래성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이 썼던 무기와 방어구가 다량 출토되었다. 주로 활과 화살, 둥근 칼, 창, 갑옷 등으로 당시 조선군의 주된 무기와 방어전략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동래읍성 해자 발굴조사 내용과 결과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이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확인시켜준 놀라운 고고학적 성과였다.
이 유물 가운데 조선군이 착용했던 투구가 있는데 당시 발굴 유물로는 국내 첫 사례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햇빛을 가리는 챙이 달린 투구를 첨주라고 불렀는데,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같은 형태로 만든 첨주가 2점 출토됐다. 투구 높이는 20㎝ 정도이며, 넓은 철판 4매를 사용하여 마치 절구통을 뒤집어놓은 듯한 형태로 제작했다.
철판 사이는 사다리꼴의 좁은 철판 4매를 십자로 덧대었으며 여러 개 못으로 고정하였다. 윗부분 중앙에는 원형 철판을 둥글게 돌출시켜 볼록한 모양의 꼭지를 만들었다. 햇빛가리개인 챙 부분은 투구 안쪽에서 직각에 가깝게 꺾어 못으로 고정했다. 특히 2점 중 하나의 투구에서 글자가 발견되었다. 챙 바깥면에 ‘東萊鎭上(동래진상)’, 안쪽면에 ‘東萊鎭(동래진)’이라는 한자를 못으로 찍어 누르며 새겼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上(상)’이라는 글자에 주목해 다른 지역에서 투구가 제작되어 동래진에 바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동래 주변으로 왜구 침입이 빈번해지자 태조대에 동래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응집할 군사체제인 ‘鎭(진)’을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동래진상’이 새겨진 투구는 동래읍성이 백성을 지키는 보루로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부산박물관 부산관에는 복원된 동래읍성 해자와 더불어 ‘동래진상’명 투구를 비롯한 출토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우리 선조들이 외적의 침입에 치열하게 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한 동래성 전투의 의미를 되새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