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꿈틀대는 인간의 형상들이 마음의 회오리를 일으키는 듯하다. 거대한 파도와 그 물결을 만드는 바람은 일렁이는 우리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거대한 형상들을 일군 건 가느다란 연필의 끝이다. 연필로 그은 얕은 선이 쌓이고 쌓여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부산의 중견 작가 김은주의 작품 ‘그려보다 211010’(왼쪽 사진)과 ‘무제’. 30년 넘게 연필로만 작업한 작가의 섬세함과 집념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맥화랑 제공

부산의 중견 작가로, 30년 넘게 연필로 작업한 김은주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맥화랑(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은 김은주 개인전 ‘그려보다’를 오는 31일까지 연다.

김은주 작가는 종이에 연필 하나만으로 집요하고 거침없는 작업을 수십 년간 이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와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국립현대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등 국내 미술관에서 두루 전시를 소화했다. 또 키아크와 아트부산, 아트 타이베이, 아트 센트럴 홍콩,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 등 국내외 미술 시장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초기부터 최근까지 작품 세계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그림들로 채워졌다. 작가는 1990년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인체 드로잉에 집중하며 날 선 연필로 폭 20ｍ가 넘는 벽면 전체를 거대한 군상으로 덮어버리거나, 화면 밖으로 벗어나려는 듯 꿈틀대는 인간의 형상을 그렸다. 이런 인간의 형상을 통해 사회의 통념이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저항,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존엄성을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했다. 그 열정과 패기가 작품에 오롯이 담겼다.

200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작업 대상은 인체에서 거대한 파도와 바람, 흩날리는 이파리와 꽃으로 넓어졌다. 연필로 그린 무수히 쌓인 선과 반복적인 선 긋기라는 고된 작업을 수행처럼 한 작가는 이 과정에서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태동한 생명력이자 에너지를 화면(종이)에 옮겨놓는다. 그렇게 긋고 그어진 선은 빛의 각도에 따라 일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하얀 종이 위에 검고 빛나는 형상은 바탕과 대조를 이루며 여백의 미를 살리기도 한다. 드로잉의 기본 재료인 연필로 빚어낸 광택과 양감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맥화랑 관계자는 “작가는 ‘꽃은 꽃이 아니고, 화병은 화병이 아니며,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라며, 그려진 대상이 무엇인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반복적인 선 긋기라는 무념무상의 작업 과정에서 그리는 자신마저 잊고, 일체의 생각에서 벗어나 그리는 행위와 하나 되는 것을 본인의 과업처럼 여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전시는 그렇게 집요하고 뚝심 있는 작업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라고 덧붙였다. 토·일 휴관. (051)722-2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