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과 면, 기본요소의 조합 특색

큰 붓으로 그어 내린 선이 면포에 스미듯 번지며 오묘한 빛을 품은 면이 된다. 얇은 연필로 신문 위에 반복적으로 선을 그었더니 글자가 지워지고 울퉁불퉁한 면이 탄생했다. 선을 그어 만든 면은 얇은 표면을 뚫고 나아가 더 깊은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윤형근 작가의 작품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데이트갤러리 제공

한국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과 최병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데이트갤러리(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가 마련한 ‘선에서 면으로-윤형근 최병소 2인전’은 단색화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두 거장을 동시에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윤형근(1928~2007년) 작가는 면포나 마포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과 땅의 색인 암갈색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찍어 내려 곧게 그은 ‘천지문’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유신 체제 등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는 장인이자 예술적 스승인 김환기 화백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 중에서도 단색화에 집중했다. 그의 작품은 여백과 대비, 절제미를 통해 한국의 수수함과 겸손함이라는 정서를 드러낸다. 동시에 시대의 아픔 속에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곧게 서 있는 나무 기둥과 같은 강인한 정신을 대변한다. 작가는 세계 유명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 뉴욕본점에서 2017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 두루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하루 관람객 1000명의 기록을 세우는 등 평단과 관람객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RM이 사랑하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최병소 작가의 작품(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최병소 작가는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1974년 젊은 작가들과 함께 만든 ‘대구현대미술제’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해 왔다. 그는 신문지나 잡지에 볼펜과 연필로 반복적인 선을 그어 그 내용을 지워나가며 찢어지고 까맣게 변한 신문지 고유의 물성을 바꾸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채우는 동시에 지우는 수행 작업을 통해 물질의 변화와 새로운 물성의 탄생을 보여주는 작업은 어떤 면에선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두루 전시하며 명성을 쌓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대조적이면서도 선과 면이란 기본 요소의 조합을 일관되게 실험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윤형근 작가의 작품 속에 그어진 선이 물감의 번짐을 통해 흐려지며 느릿한 시간을 대변하는 데 반해, 최병소 작가의 ‘TIME’ ‘LIFE’ 같은 시간성 단어를 노출한 작품은 강하게 여러 번 그어진 선에서 속도감이 느껴지며 시간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어 이를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데이트갤러리 관계자는 “두 작가 모두 얇은 표면을 다뤘지만 작품에 들인 공이나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깊다”며 “끊임없이 실험하고 저항해 일궈낸 두 거장의 작품을 실감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31일까지. (051)758-9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