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때 지역·중앙 화단 뒤섞여
- 부산 유례 없이 독특한 미술문화
- 당시 전시회·언론보도 등 기록
- 내달 근현대역사관서 북콘서트

미술비평가 박진희(큐레이터·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쓰고 엮은 책 ‘한국 근현대 화가들의 부산시대’는 한국 미술사와 지역 문화 관점에서 소중한 결실이다. 특히 부산 예술·문화 현장에서 요긴하고, 활용도 또한 높을 것으로 보인다.

화가 박고석이 부산 시절에 그린 1951년 작품 ‘범일동 풍경’. 평양 태생 박고석은 한국 화단의 중요한 작가이다. 뮤트스튜디오 제공

지역 문화 관점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자. 한 도시의 품격이나 지역민의 자긍심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문화력이 있다. 예술·문화에서 우러나오는 힘을 뜻한다. 문화력의 바탕에는 문화 정체성이 있다. 우리 지역의 문화에 어떤 특징이 있고, 왜 그런 성격이 형성됐는지 알면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문화 정체성을 다질 때 꼭 필요한 영역이 문화사(史)다. 역사를 모르면 헷갈리고, 중심을 잡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움이 튀어나온다. 지역문화사는 생각만큼 지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체계 있게 잘 정리되지 못할 가능성이 따라다닌다. 자료·사료가 뜻밖에 모자라고, 출판·지식 시장에서 시장성이 떨어져서인지 기록·평가 작업 또한 활발하지 못한 경향도 있다. 이런 형편을 고려하면 ‘한국 근현대 화가들의 부산시대’는 더 진지하게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2018년 부산시립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피란수도 부산, 절망 속에 핀 꽃’을 정리한 책자 등 관련 자료가 꽤 있지만, 이 책은 접근하기 쉬운 단행본으로 시중에 나온 점에서도 차이는 있다.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의 기획의도를 간추릴 수 있다. “한국 미술사에서 한국전쟁기의 작품을 주목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빈약한 유산 탓으로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화단의 연구 결과들로 바라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시공간이 압축된 피란수도 부산에서의 미술 문화는 유례없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한국전쟁 피란 시기 미술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역사적 바탕을 ‘부산’을 거점으로 두면서, 미술계가 재편되는 변화의 과정을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이 책에는 부산 경남의 훌륭한 미술가들의 활동과 작품을 최대한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책 구성은 서문의 선언을 짜임새 있게 충실히 구현한다. “피란 예술가와 토착 예술가가 임시수도였던 부산이라는 한 공간에서 섞여 전에 없던 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50년부터 53년,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미술계, 예술계가 한정된 공간에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섞이게 된 것이다.” 섞이고 충돌할 때 예술은 ‘퀀텀 점프’(단기간에 크게 도약)할 때가 많다.

‘토벽 동인’은 전국 미술가들이 부산에 몰려왔을 때, 부산 경남 미술인들이 응전하는 차원에서 출범한 미술 동인 성격이 있다. 책은 토벽 동인부터 이른바 중앙 화단 화가들이 전개한 신사실파전, 기조전, 후반기전 등을 기록했다. 이런 활동이 주로 이뤄진 당시 부산의 다방에 관한 정리도 눈길을 끈다. 화가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는 답장을 받을 장소로 다방 주소를 적기도 했다. 김환기 등이 주도한 신사실파전은 광복동 임시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다.

그때 부산의 미술 활동을 기록하고 비평한 국제신문 등 언론의 활동, 종군 화가, 화가들의 피란처가 돼 준 대한도기 등도 흥미롭다. 부록으로 ‘한국전쟁기 문화예술 관련 기사 목록’ ‘한국전쟁기 부산의 미술전시 연표’를 실었다. 어떤 대목에서 건조한 자료집 성격도 보이지만, 김종식 양달석 임호 문신 이중섭 전혁림 이응노 정인성 등 쟁쟁한 작가들의 당시 작품을 싣고 간명하게 해설해 생기를 갖췄다. 오는 3월 15일 오후 2시 부산 중구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에서 책을 펴낸 뮤트스튜디오와 역사관이 협업하는 ‘한국 근현대 화가들의 부산시대’ 북콘서트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