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눔·폐기물로 나온 옛 그림들
- 꽃·풍경·산수 등 오려내 콜라주
- 남은 종이 재조합 ‘오각형’ 연작
- 버려진 이미지의 부활 보여줘

“제가 버리는 걸 잘 못해요. 작업하면서 늘 생기는 부채감이 버려지는 종이, 즉 종이의 여백을 버릴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드러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이번 전시에서 그 완결 과정을 보여주게 된 것 같아요.”

이창진 작가의 ‘어마산수 2024’. 옛 동양화를 수집해 콜라주 기법으로 재구성한 동양화이다.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47) 작가 작품의 시작은 ‘쓸모를 다 하고 버려진 것들’이다. 번듯한 곳에 걸려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뒤로 밀려나 창고나 쓰레기통에 처박힌 그림이 작업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자 재료가 되었다. 2022년부터 버려진 옛 그림을 모으기 시작한 지 3년째. 누군가에게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그림이 작가에게는 새로운 모티브가 된 것이다.

어컴퍼니(부산 해운대구 좌동순환로 433번길)에서 오는 31일까지 열리는 이창진 개인전 ‘빈 종이’는 지속가능한 예술의 실천 과정을 보여준다. 버려진 그림과 그림을 오려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투리 종이까지 모두 작품으로 되살린 결과물은 환경 문제를 떠나 ‘쓸모를 다했다는 기한이 과연 어디까지일까’란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부산대 미술학과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현재 ‘예술지구_P’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그는 금샘미술관 스페이스xx 등의 공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아세안문화원(‘아세안 온 더 무브’) 부산현대미술관(Moca cillection#1) 토탈미술관(‘중심의 전환’) F1963(‘있었지만 없었습니다’)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도 다수 참여했다.

오려낸 종이를 조합해 여백의 미를 살린 신작 ‘오각형’. 어컴퍼니 제공

“평소 중고를 좋아하고, 당근마켓 보는 게 취미였어요. 그런데 산수화 같은 옛 그림이 계속 무료 나눔으로 나오더라고요. 작가의 입장에서 그림이 자꾸 버려지는 걸 보니 ‘내 작품도 어느 순간 없어지겠지’란 감정이 이입되면서 그것들을 모아 다른 풍경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무료 나눔과 폐기물로 나온 옛 그림들은 그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다양한 풍경과 꽃 물고기 산수 말 아낙네 등을 오려내 콜라주 기법(다양한 재료를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기법)으로 재구성해 동양화 ‘어마산수’ 시리즈가 나왔다. 지난해 금샘미술관에서 먼저 선보인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도 특별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작업했다기보다 수거되는 그림에 따라 꽃이 많으면 꽃을 모아 ‘다이어그램’이, 산수화가 쌓이면 ‘어마산수’가, 그렇게 작품이 하나씩 탄생했습니다. 그림을 모으다 보니 데이터가 수집·축적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림의 역사를 쌓는 것 같아 이 작업에 ‘통계학적 미술사’라는 이름을 붙여 봤어요.”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원화를 자르고 오려내는 과정에서 나온 버려진 종이를 소재로 만든 ‘오각형’ 연작이 그 결과물이다. 버려진 종이를 되살려 모자이크와 콜라주 기법으로 재조합해 여백의 미를 살린 작품으로 내놓았다. 다른 형상을 받쳐주다 버려진 종이를 주체적인 존재로 여기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과정이 인상적이다. 또 새의 모양을 오려내는 과정에서 덧댄 종이들을 전시해, 새의 모습에서 추상의 형태로 날아오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 ‘복제’는 바깥으로 밀려난 이미지들의 부활을 보여주며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전시는 작업 과정에서 버려진 여백이 남는 숙제까지 해낸, 완결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환경 문제란 심각한 담론을 얘기하겠다는 것보다, 제 삶의 태도가 작업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하지만 저는 버려진 것, 중고에 더 관심이 많거든요. 여전히 다양한 것을 수집하고 있는 만큼 모은 것에서 떠오르는 게 있으면 또 다른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