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황간읍 원촌리 광장에서 바라본 월류봉. 월류봉은 월류정이 들어선 돌출 암봉을 축으로 6개의 봉우리가 작은 산맥을 이루고 있다.

- '느림의 철학자'인 정시한의 여행지
- 한반도 닮은 꼴 원촌리 앞 월류봉
- 한천 따라 벼랑이 M자로 3㎞ 병풍

불꽃 같은 갈기. 보일 듯 말 듯 날렵한 비상. 봄은 들판 가득 '햇살 군단'을 풀어놓았다. '야마(野馬)'란 별칭이 어울리는 아지랑이다. 아지랑이는 자유의 전도사일까.

이 봄이 가기 전에 어디든 떠나 길 위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라고 권유한다. 330년 전 이맘때 아지랑이를 좇아 유랑에 나선 '길 위의 철학자'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거유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다.

그는 1686년 3월 13일부터 1688년 9월 19일까지 4차례에 걸쳐 전국을 여행했다. 햇수로 3년, 총 600일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그는 그 여정의 체험과 사유를 '산중일기'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우담은 '느림'을 추구했다.

칼날을 세워놓은 듯한 백화산 능선.

그는 "산수를 유람할 때 집안 뜰을 걷는 것처럼 걸음걸이를 재촉하지 않았기에 먼 곳까지 이를 수 있었고, 책을 읽을 땐 성현의 가르침을 듣는 것처럼 많이 읽으려고 욕심내지 않아 오래도록 버티며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그런 그를 "정구(鄭逑·1543~1620),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선생 이후 진정한 학자와 순수한 학문은 오직 정시한 선생 한 분뿐"이라고 평했다.

산중일기를 지도 삼아 길을 떠났다. 느림의 여행이자 '서두를수록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欲速不達·욕속부달)'는 공자의 말씀을 몸소 깨닫는 은근과 끈기의 여행이다.

■달과 마음 서로 비추다

우담은 강원도 원주 법천의 집을 나선 지 13일 만인 1686년 3월 26일, 충청도 영동군 황간읍의 한천(寒泉·현 황간면 원촌리)에 이르렀다. 한천은 추풍령과 상주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만나 푸른 비단을 푼 듯 월류봉(月留峯)을 휘돌아 굽이치다 금강에 몸을 섞는 청정 하천이다. "대(臺) 위에 앉으니 큰 냇물이 합쳐져 흘렀고, 봉우리들은 깎은 듯 천 길이나 되게 서 있었다. 물 밑에는 돌들이 깔려 있어 맑은 기운이 왕성했다. 절벽을 보니 진달래가 솔 숲 사이에 활짝 피어 기이한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우담의 기행문은 담박했지만, 지난 25일 현지에 가서 본 실경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감동은 원촌리 초입에서부터 시작됐다. 다리를 건너려는데 오른쪽에 한천을 사이에 두고 월류봉과 마주 보고 있는 수십 m 높이의 백화산 석벽이 일직선으로 수백 m나 뻗어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폭파 따위의 개발 후유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 그대로의 경물이었다.

한천의 외곽이 이럴진대 속살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가 커지면서 가슴은 설렘으로 일렁였다. 한천의 중심부로 들어가 그 기대가 사실임을 확인한 순간 기쁨 어린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월류정이 들어선 돌출 암봉을 축으로 월류봉은 최대 고도 404m에 달하는 깎아지른 벼랑을 완만한 'M'자형으로 3㎞ 넘게 병풍처럼 굽이굽이 펼쳐냈다.

월류봉은 이름도 실경만큼 고상하다. 돌출 암봉을 제외한 해발 370m 이상 6개의 봉우리 위로 달이 떠 서쪽으로 흐르듯 머물다 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 마음이 달을 비추면(我心照月·아심조월)/달도 내 마음을 비추네(月照我心·월조아심)/내 마음이여, 저 달이여(心歟月歟·심여월여)'. 우담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서 노닐었다. 시에서 소쇄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원촌리는 한반도 축소판

월류봉에서 내려다본 원촌리는 한반도 지도를 닮았다.

한천을 제대로 즐기려면 월류봉에 올라야 한다. 원촌리에서 월류봉에 오르려면 한천을 건너야 하는데, 징검다리가 빗물에 떠내려가 건널 수 없었다. 원촌리를 벗어나 월류봉 뒤쪽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해야 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비탈의 자드락길은 가파르고 험했다. 경사가 너무 심해 세 걸음 내디디고 가쁜 숨을 골라야 했다. 나무 줄기를 붙잡고 1시간가량 악천고투하며 오른 끝에 도달한 곳은 해발 383m의 월류2봉.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가슴 밑바닥에선 희열이 솟구쳐 올랐다. 까마득한 산 아래 풍경이 별천지인 듯 그윽하고 화사했기 때문이다.

봉우리에서 내려다본 원촌리는 한반도 지도를 빼닮았다. 원촌리에서 바라본 한천은 'M'자형이었는데, 월류봉에서 굽어본 한천은 거꾸로 'W'자형이었다. 월류2봉 좌우의 5개 봉우리는 아름다움을 다투듯 짙푸릇 솔숲을 머리에 이고 우뚝 솟아 있었다. 백화산의 능선은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놓은 듯 뾰족했다. "6개 봉우리를 넘어 월류봉 능선을 종주하는데 3시간 남짓 걸립니다. 산세가 험해 오르내리기 쉽지 않지만 일단 올라오면 경치가 워낙 빼어나 등산객들이 '오길 잘했다'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10년째 월류봉과 백화산에서 산불감시원으로 근무 중인 김교숙(54) 씨는 고향의 경승지 자랑을 하느라 입에 침이 마르는 줄 몰랐다.

추상 조각품 같은 한천 바닥.

한천의 절경을 좀 더 보려고 월유봉에서 내려와 원촌리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돌출 암봉과 마주한 광장을 지나 영동군이 조성한 산책로를 따라 한천 하류 쪽으로 내려갔다. 1㎞쯤 가니 상류에서 보지 못했던 하천 바닥의 수려한 경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는 작은 돌들이 즐비했지만 군데군데 하천을 가로지르는 널따란 암반도 볼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침식작용으로 울퉁불퉁 굴곡진 암반의 모양새가 추상 조각을 연상케 했다. 영동군은 바닥의 돌을 걷어낸 뒤 다리를 건설하고 있었다. 완공 후의 모습이 어떨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훼손된 자연은 영원히 원형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당색·정견 초월한 선비 의리

우암 송시열 유허비.

원촌리 과수원 뒤편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제자를 가르쳤던 서재가 있다. '한천정사(寒泉精舍)'다. '한천'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과수원 내 하천가에는 우암의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우담과 우암 사이에는 미담이 전해진다. 적대관계의 당파와 상반된 정치적 입장을 떠나 선비로서 소신과 지조를 지킨 데 대해 서로 존중하고 예우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우담은 남인, 우암은 서인이었다.

우담은 평소 "(숭명반청의) 춘추대의를 자임하며 일생토록 큰소리만 치던 사람(우암)이 단지 모든 것을 걸고 명예와 지위를 취하려 했을 뿐, 끝내 압록강을 한 걸음이라도 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우암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남인이 우암을 역적의 수괴로 몰아 사사하자 우암의 죽음이 민심에 부합하지 못했다며 되레 남인을 꾸짖었다. 그에 앞서 제주도로 유배 가는 우암을 직접 전송하기도 했다.

우암도 우담을 비롯한 남인 출신 몇몇 학자들의 학행을 주목하고 그들의 등용을 주선했다. 등용이 성사되지 않자 우암은 "사람을 쓰거나 죄 주는 일은 절대 당색에 따라 그 경중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며 자파 당인들에게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소인을 배격하고 군자를 지향하는 선비의 의리를 보여준 대목이라 하겠다.

정권 쟁취에 혈안이 돼 의리나 예의를 사치로 여기는 요즘 우리 정치판과 대조적인 면모다. 경치도 이런 인간적 의리가 스며들어야 보고 즐길 맛이 나지 않을까? 두 사람의 의리가 깃든 한천의 절경에 더욱 애착이 가는 이유다.


# 인근 노근리엔 아픔의 역사가…

노근리 학살사건이 발생한 쌍굴다리.

한천에서 3㎞가량 떨어진 곳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있다. 1950년 7월, 영동읍 임계·주곡리 주민을 비롯한 500여 명의 피란민이 미군의 무차별 비행기 폭격과 기총 소사를 받고 그중 300명가량이 학살된 서울 기점 225㎞ 지점의 경부선 철로변이다.

현장에는 피란민들이 숨진 쌍굴다리(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9호)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다리 안팎에는 움푹 팬 총탄 흔적이 빼곡하다. 그 흔적마다 동그라미나 세모 표시를 해놓아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한천 같은 절경과 이런 지옥이 근거리에서 공존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영동군은 억울한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이 일대 13만2000여 ㎡의 땅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기념관을 지었다. 기념관 전면과 측면에 설치된 철판의 형상이 인상적이다. 둥근 구멍이 숭숭 뚫린 밤색 철판을 세모꼴로 구획해 군데군데 밖으로 돌출시켜 놓은 게 약육강식의 앙상한 몰골로 남은 근대문명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쌍굴다리 옆에 놓인 방명록에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모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