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깨비나라에 미치광이 되기 싫다"

- 전라도 광양서 태어난 매천 황현
- 이건창·김택영과 조선 3대 문인 꼽혀
- 장원급제에도 관직 단념한 시문의 천재
- 구례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며 은둔

#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힘들구나"

- 홍류동 계곡 농산정 최치원 시 차운
- 당대 격변의 세상사 시로 표현하고
- 보고 듣고 겪은 사건 혈서 쓰듯 기록
- 호양학교 설립 교육통한 계몽운동 추구
- 한일합방 반포일 절명시 남기고 자살

지위와 인맥을 이용해 수억~수백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전·현직 검사장, "민중은 개돼지 취급하면 된다"는 막말을 내뱉은 정부 고위 관리…. 사회 지도층의 비리가 꼬리를 물면서 덩달아 지식인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습득한 지식의 가치를 인정해 높은 자리에 앉혔지만, 정작 그 지식은 공익이 아닌 사익 추구의 수단이 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산 홍류동 계곡. 울창한 솔숲 속에 보이는 정자가 최치원이 은둔했던 농산정이고, 바로 아래 계곡에 최치원의 시를 새긴 바위가 보인다.

올곧은 비판이 사명인 지식인의 타락은 사회기강의 해이와 국가 위기로 직결된다. 한 세기 전 조선의 멸망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혈서를 쓰듯이 그 실상을 또박또박 기록했다. 결론은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해친 다음에 남이 망친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국필자벌이후인벌지)"는 뼈저린 교훈이다.

매천은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닌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오늘날 지식인들이 그를 거울로 삼아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다. 지난 11일 매천의 시와 역사 저서에 나와 있는 그의 삶을 더듬어 갔다.

■죽음으로 실천한 의리

	매천 초상화

매천이 살았던 시대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한 서구 국가들이 발달한 과학기술과 무력을 앞세워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고 있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눈과 귀를 닫은 조선은 내부의 개혁 기운을 거세한 채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서구 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국력을 신장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격동의 시기에 매천은 전라도 광양 서석촌(현 광양시 봉강면 서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순천 광양 등지에서 장사를 해 부를 쌓은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어릴 때부터 한학에 몰두했다. 소년시절 신동으로 불렸던 매천은 22세 때 더 큰 배움터를 찾아 한양으로 올라갔다. 한양에서 그는 당대의 일류 문사였던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을 만나 교유하며 시인으로서 문명을 떨쳤다. 매천과 영재, 창강은 조선 말기의 3대 문인으로 우리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창강은 "매천의 시는 대단히 맑고 회오리바람처럼 강경한 풍격이 조선 문단의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평했다.

매천은 한양 생활 9년만인 1885년 31세의 나이로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다. 하지만 그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가족이 이주해 살고 있던 구례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했다. 한양의 친구들이 서찰을 보내 은거를 책망할 때마다 그는 "자네는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도깨비 나라, 미친 사람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똑같이 도깨비, 미치광이가 되게 하려는가"라고 되묻곤 했다. 당시 사정이 어떠했기에 그가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매천 생가

"초시를 매매하던 당초에는 그 가격이 200냥 혹은 300냥으로 일정하지 않았으며 500냥에 이르면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갑오년(1894년) 직전의 몇 차례 식년시에서는 1000여 냥씩 해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고, 회시에서는 1만여 냥씩 했다." "임금(고종)은 친정(親政)한 이래 날마다 유흥을 일삼아 매일 밤 연회를 열고 질탕하게 놀았다. 새벽에 이르도록 쉬지 않고 놀다가 진시(辰時·오전 7~9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휘장을 쳐서 창을 가려 어둡게 하고 잠자리에 들어 해가 기울어서야 일어났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 자리는 적어도 5만 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부임하면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다투어 공전(公錢)을 낚아채서 상환하였다." "한양의 굶주린 인구 1만9683명을 등록시켰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이가 수만 명 발생했으며, 고통을 견디지 못해 온 가족이 독약을 마시고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매천의 은둔 결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매천야록의 기사들이다.

은둔 시절 매천의 학문은 두 방면에 집중됐다. 하나는 시 창작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연구다. 37세 되던 해인 1886년 봄, 경상도 합천 가야산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유람하며 지은 시에서 그의 마음가짐을 들여다볼 수 있다. 홍류동은 가야산의 계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길이가 4㎞에 달한다. 솔숲이 우거진 높다란 벼랑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에, 가을에는 단풍에 붉게 물든다고 해서 홍류동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여름엔 시원스레 쏟아지는 계곡물이 금강산 '옥류천'과 비슷하다고 해서 '구슬 옥(玉)' 자를 써서 '옥류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식인 노릇 하기 어렵다"

	농산정

'구불구불 겹겹 잠긴 봉우리 울리며(雷硠百折鎖重巒·뇌랑백절쇄중만)/옥동 봄물 붉고 푸른 사이로 흐르네(玉洞春流紫翠間·옥동춘류자취간)/산은 고운의 시로 더욱 드러났지만(山自古雲詩益著·산자고운시익저)/농산은 산을 잘 감춘 건 아니구나(籠山未必善藏山·농산미필선장산)'. 이 시는 매천이 고운 최치원(崔致遠·857~?) 시의 운을 따서 지은 것이다.

매천이 차운한 고운의 시는 이렇다. '첩첩 바위 사이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하기 어렵구나(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늘 시비하는 소리 들릴세라(尙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쌌네(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해인사 매표소에서 500m가량 올라가면 홍류동 계곡 위 솔숲 속에 '농산정'이라 명명한 정자가 있다. 고운의 은거지다. 정자 아래 계곡의 한 바위에 고운의 이 시를 새겨놓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하얀 암반과 진녹색 솔숲이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룬 풍경이 자못 청량하다. 이곳에 오래 머물면 속진을 말끔히 씻고 우화등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두 시를 비교해서 읽으면 고운의 농산이 미비하다고 한 매천의 시구에서 강한 둔세(遁世)의 뜻이 느껴진다. 하지만 매천은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부패한 정부가 혐오스러웠을 뿐이지 늘 머릿속에는 백성과 나라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직접 겪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사건, 신문이나 책에서 본 일 등 크든 작든 당대의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최대한 기술하려 애쓴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매천이 설립한 사립 호양학교

매천은 동지들과 힘을 합쳐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도 나섰다. 1908년 그가 삶을 마감한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의 아랫마을인 지천리에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다. 호남 최초의 신문화 학교다. 매천은 학교 설립을 위해 성금 모금 호소문을 써서 돌렸고, 그 결과 상류층 인사들로부터 720원을 모을 수 있었다. 그의 개화론은 지엽만 탐하지 말고 근본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이를 멀리하는 것, 백성을 사랑하고 재정을 절약하는 것, 상벌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이 근본"이라고 했다.

그랬던 매천도 망국에 이르러선 더는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한일 합방령이 반포된 1910년 8월 3일 밤, 그는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긴 뒤 아편을 먹고 이튿날 숨을 거뒀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鳥獸哀鳴海岳頻·조수애명해악빈)/무궁화 세계 이젠 망해버렸구나(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을 돌아보니(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難作人間食字人·난작인간식자인)'.

네 수 중 세 번째 시다. 네 수 모두 절절하지만, 이 시가 가장 애송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 깃든 담박하면서 처연한 풍격 때문이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었던 매천의 진솔한 탄식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는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되묻게 하는 양심의 소리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