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쓰기 꺼리던 조선 실학자 박지원
- 벗과 금강산 유람 중 총석정 일출 보며
- 70구 490자 장문의 걸작시 남겨

- 신분 차별 철폐와 선진문물 수용 등
- 근대 향한 강렬한 개혁 의지 담아

- 이젠 통일전망대서나 보이는 북녘 땅
- 남쪽 아래 관동팔경 청간정에도
- 그 뜨거운 애민사상 붉게 뜨는구나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 보기 어려운 법/연암 시를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우담바라꽃 피고 포청천 웃을 때/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 쓸 때라네'.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가 스승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작시를 주제로 쓴 시다. 우담바라는 3000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상상의 식물, 포청천은 웃는 것이 100년에 한 번 황하가 맑아지는 데 비유될 정도로 잘 웃지 않았던 중국 송나라의 관리다. 그만큼 연암이 시 쓰길 꺼렸다는 얘기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청간정에서 바라본 동해 해돋이. 청간정은 통일전망대에서 남쪽으로 56㎞ 떨어진 곳에 있다.

현전하는 연암의 시는 42수에 불과하다. 그의 아들은 "아버님은 본시 시인으로 자처하지 않아 남과 더불어 시를 주고받은 것이 극히 드물었는데,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는 형식적 구속 때문"이라고 했다. 그랬던 연암이 득의작(得意作)으로 꼽아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은 시가 있다. 1765년 가을, 벗들과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총석정 해돋이를 바라보며'라는 70구, 490자의 장시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되는 연암의 시적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이다.

이 시에는 강렬한 사회개혁 의지가 담겨 있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 실생활에 활용하고, 부자의 토지 겸병을 막아 경작하는 농민이 땅을 갖게 함으로써 민생을 살찌우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사상이 그 의지의 산물이다. 해맞이는 그런 사상이 제도화하는 새 시대, 곧 근대를 상징한다. 지난 5, 6일 연암이 250여 년 전 걸었던 '근대 유람길'을 따라 강원도 고성군으로 갔다.

■연암 좇아 동해 해맞이

	연암 박지원 초상화.

연암이 동해의 해돋이를 봤던 총석정(叢石亭)은 해금강에 있다. 휴전선 이북의 북한 땅이다. '총석'은 금강산 줄기가 바다로 뻗어 내려 만들어진 섬이다. 바다 위로 돌출한 현무암이 오랜 기간 비바람과 파도에 마모되면서 생긴 육각 팔각 등 다각형의 돌기둥이 첩첩 쌓여 기묘한 석림(石林)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 지은 총석정은 관동팔경 중 경관이 가장 빼어나 해맞이의 명소로 꼽힌다.

고성 방문 첫날,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오다 속초로 빠져나와 해안길을 따라 현내면 저진리 통일전망대로 차를 몰았다. 총석정에 갈 수는 없지만 해금강이 보이는 곳에서 연암의 해맞이 시심을 느껴 보고 싶어서였다. 해발 70m의 통일전망대에 올라서서 바라본 금강산과 해금강의 풍경은 참 고즈넉했다.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만 없다면 인적이 드문 남태평양의 바닷가를 연상했을 것이다.

두 팔을 앞으로 뻗어 미끄러지며 물에 잠기는 듯한 금강산 구선봉. 그 동쪽에는 만물상 부처바위 사공바위 등 해금강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밀가루를 뿌린 듯 새하얀 해변은 바다로 툭 튀어나온 송도를 중간에 두고 활처럼 휘어져 남으로 이어졌고, 에메랄드 빛 바다는 숨을 멈춘 듯 잔잔했다. 서쪽으로는 북한군 초소가 자리한 산 뒤편으로 일출봉 채하봉 육선봉 집선봉 세존봉 옥녀봉 등 외금강의 준봉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 발길이 묶인 이 분단 현실을 본다면 연암은 뭐라고 할까? 한양에서 북한 땅을 종단해 북경에 들렀다가 만리장성을 넘어 황제의 여름 궁전이 있는 열하까지 가는 대장정을 했던 연암. 보고 들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전파하려고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충격을 받고 20세 전후 심하게 앓았던 우울증이 재발할지도 모른다.

	김홍도가 그린'총석정도'.

할 수만 있다면 다음 날 새벽 통일전망대에서 해돋이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통일전망대의 개장시간이 오전 9시여서 그럴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통일전망대에서 남쪽으로 56㎞가량 떨어진 청간정(淸澗亭)이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이 정자는 시야가 탁 트여 날씨만 좋으면 해돋이를 잘 볼 수 있을 듯했다. 청간정 뒤에는 멀찌감치 설악산 울산바위가 성곽처럼 버티고 있었다.

연암의 해맞이 감회는 어땠을까? 그의 해돋이 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약 4㎞ 거리의 숙소에서 첫닭이 울면 총석정으로 가기 위해 잠을 설치며 기다리고 있는 연암 일행의 모습이다. 둘째 부분은 총석정에 도착한 뒤 해가 뜨기 전까지의 바다 풍경. 관찰이 정치한 데다 비유와 수사의 풍격이 높아 시적 긴장감과 울림이 자못 크다.

'이 밤 오래도록 새지 않을까 걱정이네(但愁此夜久未曙·단수차야구미서)/이제부터 혼돈은 누가 다시 밝힐까(從今混沌誰復徵·종금혼돈수복징)/아마도 겨울 신이 제 힘 과시하여(無乃玄冥劇用武·무내현명극용무)/음침한 땅속 일찍 닫고 해 진 곳 얼게 하지 않았나(九幽早閉虞淵氷·구유조폐우연빙)/혹여 하늘 축이 오래도록 돌고 돌다(恐是乾軸旋斡久·공시건축선간구)/서북쪽으로 기울어져 묶은 줄이 끊어진 건 아닌지(遂傾西北隳環絙·수경서북휴환환)'.

■네모난 해맞이…'개혁'

	통일전망대에서 본 금강산과 해금강.

둘째 시구의 '혼돈'은 천지개벽 초 만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단순히 더디 새는 밤으로 해석하면 간명하지만, 시대를 거스르는 모순적인 제도와 관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상공업 등 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배층 외 새로 부를 쌓은 세력이 부상하면서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암의 소설 '양반전'이 한 예다. 연암과 초정 등 북학파는 이런 흐름에 부응해 상업의 진흥과 청나라 문물 수입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배층은 청나라를 오랑캐라 업신여기면서 조선은 명나라 문화를 계승한 '소중화(小中華)'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일부 사대부들은 북학론을 펴는 연암이 청나라의 건륭 연호를 썼다는 이유로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虜號之稿·노호지고)'라고 비방하기도 했다. 혼돈은 그런 폐단을 상징한다.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의 정미함과 제작의 굉원함과 문장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당·송·명의 고유한 옛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연암은 초정의 저서 '북학의(北學議)' 서문에서 이같이 개탄했다.

시의 셋째 부분은 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조금 뒤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斯須水面若小癤·사수수면약소절)/용 발톱에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誤觸龍爪毒可疼·오촉용조독가동)/그 색이 점점 커져 만 리를 뻗어 나가(其色漸大通萬里·기색점대통만리)/물결 위로 번진 햇무리 꿩 가슴처럼 붉도다(波上邃暈如雉膺·파상수훈여치응)'. 기자가 청간정에서 본 해 뜨는 모습 역시 연암의 묘사와 흡사했다. 처음엔 손톱 만한 붉은 점이 수평선에 걸치더니, 몸집이 점차 커져 바다와 하늘을 태울 듯 번져나가는 게 순식간이었다.

육만사천년 둥글게 떴으니(圓來六萬四千年·원래육만사천년)/오늘 아침 모습을 바꿔 네모가 될 수도 있으리라(今朝改規或四楞·금조개규혹사릉)/만 길 깊은 바다에서 누가 길어 올렸을까(萬丈海深誰汲引·만장해심수급인)/이제서야 알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始信天有階可陞·시신천유계가승)…만물이 어제처럼 모두 우러러보니(萬物咸覩如昨日·만물함도여작일)/누가 있어 두 손으로 단번에 올려놓았나(有誰雙擎一躍騰·유수쌍경일약등)'.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따르면, 우주가 열려 소멸할 때까지 기간이 12만9600년이다. 6만4000년이면 그 절반에 해당한다. 연암은 나머지 절반의 기간이 시작되는 해돋이에서 둥근 해가 아닌 '네모난 해'를 고대하고 있었다. 무슨 뜻일까? 개혁이다. 네모난 해가 뜨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신분제, 농사는 안 짓고 토지만 겸병하는 지주, 권력 쟁취에 혈안이 돼 당파싸움을 일삼는 벼슬아치 등 모든 사회적 적폐가 일소된 새 세상의 도래다. 고로, 해돋이는 희망이다. 해돋이가 희망이 되려면 개혁의지가 투사되어야 한다. 연암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