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녀자·사대부 가릴 것 없이
- 소설읽기에 심취하던 시대 흐름
- "패설체 배격, 고전체 돌아가라"는
- 1792년 정조 '문체반정'에 역행

- "나는 요즘 사람이다
- 문장에 고문·금문의 구별 없어…
-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
- 끝내 소신 꺾지 않은 경금자 이옥
- 책문 격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 장원급제하고도 꼴찌 강등·벼슬 못올라

- 속된 말 뜻하는 문집 '이언'에
- 여성·민초의 감정 담은 시 66수 실어
- 근대 사실주의적인 문학세계 보는 듯

"패설체를 쓰지 말라!" 1792년 조선 정조(正祖·1752~1800)는 몇 가지 엄명을 내렸다. 중국판 패설 수입 금지, 패설체 문장을 쓰는 유생의 과거 응시자격 박탈, 패설체를 구사한 관리의 반성문 제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시작이었다. 소설과 신변잡기 문체를 뜻하는 패설체를 배격하고 사서삼경과 '사기' 같은 고전의 문체로 돌아가자는 이 문화 정책은 '개혁 군주' 정조의 이미지와 배치되는 보수적인 얼굴을 지녔다.

	서울 성균관 명륜당. 두 그루의 은행나무 사이로 본 건물에서 고졸한 운치가 풍긴다. 은행나무는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으로, 500년이 흐르면서 높이 30m가 넘는 거목으로 자랐다.

사상 통제라는 비난이 뒤따랐지만, 벼슬길이 막힐 것을 우려한 대다수의 사대부는 즉각 굴복했다. 그러나 경금자(絅錦子) 이옥(李鈺·1760~1815)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는 경금자였다. 그는 당시 양반은 제외됐던 충군(充軍·군역) 처벌을 두 번이나 받았고,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고도 꼴찌로 강등되는 수모도 겪었다.

그럼에도 경금자는 정조가 패설체라고 질책했던 자신의 문체를 고수했다. 그 결과 그는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시각으로 인간 심리와 세태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걸작들을 남겼다. 그 작품들은 근세를 훌쩍 뛰어넘어 근대에 발이 닿아 있었다. 정조는 왜 문체반정을 일으켰을까? 경금자는 왜 임금의 명령을 거부했을까? 지난달 8일 사건이 일어난 서울 성균관을 찾아 경금자의 시문에 얽힌 문체 갈등을 되짚어 봤다.

■"패설체를 쓰지 말라"

	진사식당

"시라는 것은 세상 풍속을 교화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니, 보여주는 것이 있고 하소연하는 것이 있어야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그런데 근세의 시들을 보면 슬프고 울적한 음조를 띠고 있으니 모두 시를 배우는 본뜻을 잃었다." 정조실록 19년(1795) 11월 7일 자 기사에 나오는 정조의 지적이다.

정조가 추구하는 글쓰기의 목적은 교화였다. 그러려면 '글에 도를 실어야(문이재도·文以載道)' 한다. 이는 고전 문장의 지향점이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묘호(廟號)처럼 고전 문장에 입각한 '바른' 문체를 원했다. 이런 그의 눈에 연애담을 다룬 '서상기'나 조정에 반기를 든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인 '수호지' 따위의 중국 패설들이 긍정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정조는 "과거 문장도 모두 패관소품의 문체를 모방해 경전의 의미들이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했다"며 문체반정을 통해 부패한 과거 제도까지 개혁하려고 했다. 나아가 그는 성리학적 질서를 뼈대로 한 이상 국가 건설을 꿈꿨다. 정조는 이를 위해 임금인 동시에 백성을 교화하는 스승을 자임했다.

	동재의 방

하지만 시대 흐름은 정조의 바람에 역행했다.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신흥 계층이 등장하는 등 사·농·공·상 신분제의 해체 조짐이 나타나면서 성리학적 질서는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길 원했고, 그 가능성을 소설에서 발견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소설 독자층은 빠르게 확산됐다.

정조를 보필한 재상 채제공(蔡濟恭)은 "요즘 아녀자들이 서로 다투어 가며 일로 삼는 것이 패설 읽는 것이다"고 자신의 문집에 썼다. 사대부도 소설에 심취했다. "서학교수 이상황과 김조순이 예문관에서 함께 숙직하면서 당송 시대의 소설들을 읽고 있었다. 상(上·임금)은 소설들을 불태워버리라고 명했다."(정조실록 16년 10월 24일) 정조의 노력과 달리 소설 읽기는 이미 문화 현상의 대세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경금자는 그런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고 말하지만(歡言自酒家·환언자주가)/나는 알아요, 창가에서 온 줄을(儂言自倡家·농언자창가)/어찌하여 한삼 위에(如何汗衫上·여하한삼상)/연지가 꽃처럼 물들었나요(臙脂染作花·연지염작화)'. 민간에서 쓰는 속된 말이나 속담을 가리키는 '이언(俚諺)'이란 제목 아래 묶은 66수의 연작시 중 하나다. 유교적 도덕률이라곤 그림자조차 어른거리지 않는다. 남편에 대한 투기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앙칼지거나 모질지도 않다. 애교 어린 원망을 슬쩍 흘릴 뿐이다.

	동재 옆모습

'그대 내 머리에 닿지 말아요(歡莫當儂髻·환막당농계)/저고리에 동백기름 묻어나지요(衣沾冬栢油·의점동백유)/그대 내 입술에 접근 말아요(歡莫近儂脣·환막근농순)/붉은 연지 부드러워 흘러들어요(紅脂軟欲流·홍지연욕류)'. 화류계 여성의 생활 단면을 감각적으로 포착했다. 자신에게 추근대는 남성을 재치 있는 말솜씨로 물리치고 있다. 앞선 시처럼 근대 도시의 감성이 묻어난다.

'내가 부른 사당가에(儂作社堂歌·농작사당가)/시주한 자 모두 스님이라네(施主盡居士·시주진거사)/노랫소리 절정을 넘어갈 때(唱到聲轉處·창도성전처)/나무아미타불(那無我愛美·나무아애미)'. 승려들의 타락상을 풍자한 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음차한 마지막 구절이 압권이다. 해석하면 '내가 어찌 미인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절묘한 수사에 시를 읽는 흥취가 배가된다. 경금자의 문학은 이처럼 다루는 인물과 내용이 평민 부녀자, 기녀 등 민초의 생활상이어서 근대 사실주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중요한 건 나의 글"

	성현들을 모신 대성전

이 시들을 보면 정조와 경금자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선호하는 문체가 극명하게 상반되기 때문이다.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경금자의 글 '남쪽 귀양길의 시말을 적다'에 따르면, 그는 36세이던 1795년 성균관 상재(上齋)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재는 생원과 진사가 거처하던 숙소다. 현재 강학당인 명륜당(明倫堂) 왼쪽에 자리한 동재가 그곳이다. 맞은편 서재는 옛날 사부학당에서 입학한 유생들이 기숙하던 하재(下齋)다. 동·서재는 각각 20칸의 긴 건물로 앞뒤에 툇마루가 설치된 독특한 구조다.

1398년(태조 7) 설립된 성균관의 유서 깊은 역사는 1519년(중종 14) 명륜당 앞마당 가장자리에 심은 높이 30m가 넘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증언한다. 동재 뒤편 진사식당이 특히 눈길을 끈다.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식당인 이곳은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백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식사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세 번 쳤으며, 아침과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마다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원점을 찍어줬다고 한다.

경금자는 그해 8월 성균관에 행차한 정조 앞에서 글을 지었다. 그의 글을 본 정조는 문체가 괴이하다며 일정 기간 과거 응시자격을 정지하는 정거(停擧)를 명했다가 처벌 수위를 충군으로 낮췄다. "이옥의 글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어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매일 사륙문(四六文·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했던 4자 구와 6자 구를 배열하는 문체) 50수를 짓게 해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토록 했다." 정조실록은 당시 일을 이같이 기록했다.

	서재 뒤편 별채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을 다녀온 경금자는 그 다음 달 과거를 치렀지만,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또다시 경상도 삼가현 충군을 명받았다. 이듬해 2월에는 별시 초시에 응시해 수석을 차지했으나 책문(策文)이 격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순위가 바뀌어 꼴찌로 미끄러졌다. 그는 결국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뒤 삼가현에서 118일간 충군을 이행해야 했다.

경금자를 이해한 사람은 성균관에서 만나 지기가 된 김려(金鑪·1766~1821)와 강이천(姜彛天·1769~1801)뿐이었다. 김려는 경금자의 유고 11종을 자신의 책 '담정총서'에 실어 후세에 전했다. 강이천은 "붓끝에 혀가 달렸다"고 경금자를 극찬했다. 경금자는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은 그에게 충군의 징벌도 안겨줬지만, 이처럼 우정도 선사한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경금자는 충군을 마친 뒤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인 경기도 남양에 내려가 개성적인 문체로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쓰며 여생을 보냈다.

"나는 요즘 세상 사람이다. 나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 데 선진양한(先秦兩漢)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위진삼당(魏晉三唐)에 얽매일 필요가 뭐 있는가." 김려가 전한 경금자의 소신이다. 정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연암도 같은 주장을 폈다. '나의 글'. 주체의 자각이다. 근대는 주체의 발견에서 출발한다. 문체반정은 우여곡절을 거쳐 근대의 인식으로 귀결됐다. 정조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이것이 진정 문체가 '바르게 돌아간(반정)' 게 아닐까?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