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준하 선생의 묘소 이장과정에서 재점화된 의문사에 대한 기사는 내겐 정말 충격적이었다. 37년 전에 돌아가신 선생의 유골에는 망치 같은 둔기에 맞아 함몰된 두개골이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위태로운 연말 대선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선생의 아드님 말씀처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나타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함석헌 선생이 장준하 선생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우리가 아까운 대통령감 하나를 잃었다고. 이 나라는 인물을 키우지 않는 나라라고 장탄식하시면서.

내가 한창 보수동 헌책방 순례를 하고 다니던 시절에는 이미 폐간된 지 오래인 장준하 발행의 '사상계' 잡지를 사모으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가게마다 '사상계'만 따로 모아 쌓아두곤 했으니까. 나는 '사상계'의 여러 필진들 중에서 함석헌 선생의 글을 제일 좋아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든가 함석헌 선생과 윤형중 신부가 지상논쟁을 벌였던 '할 말이 있다',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같은 논쟁의 글들이 실린 '사상계' 제호를 찾느라 덩달아 헌책방을 뒤지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교과서로 현대사를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나마 내가 아는 현대사의 밑천은 '사상계'의 필진들이나 함석헌 발행의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 얻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이 내겐 훌륭한 역사 공부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몇 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공개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인사로 규정했다. 박지만 씨는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및 배포금지 신청을 내면서 거세게 반발했다. 자식된 도리로 아비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야 백번 이해하고 남지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의 태도는 오만했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 그런 박지만 씨에게 보낸 공개서한은 인상적이었다. 동시대를 살다간 두 아버지들이 걸었던 길 만큼이나 극명하게 다른 두 아들의 삶과 역사인식이 잘 드러나 보였다.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이라고 담담히 써놓고 있었다.

아버지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 또한 '사상계'나 '돌베개' 같은 아버지의 저작들이 역사 공부의 한 방편이 되었을 거란 짐작을 해본다.

선생이 쓴 '돌베개'를 읽으며 부옇게 새벽이 밝아오던 젊은 날의 기억이 엊그제처럼 가깝다. 결혼 2주 만에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6000리 길을 걸어서 중경의 광복군을 찾아가던, 목숨을 건 그 긴 여정을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읽어내려갔던지. 선생은 나라 없는 슬픔을 짓씹으며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피눈물로 투쟁을 각오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임시정부까지 찾아간 탈주병은 50명이나 되었다. 환영회장에서 장준하 선생이 대표로 답사를 했다. 목숨 건 탈주 끝에 김구 주석 앞에 선 감격,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어디든지 가겠다는 각오에 찬 젊은 청년의 답사를 들으며 노구의 김구 선생이 흐느껴 울고 말았단다. 그러자 장내는 삽시간에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인쇄나 등사 시설은커녕 맨땅에 가마니 깔고 기거하는 광복군 훈련생 시절 3개월여 동안에도 '등불'이란 잡지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생 동지가 된 김준엽 선생이 자신의 무명내의를 잘라 종이와 겹겹이 붙여서 표지를 만들고 제자를 썼다. 그것은 그들이 조국과 민족을 향해 켠 등불이었다. 80여 명이나 되는 허기진 훈련병들이 서로 보겠다고 싸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그렇게 잡지 '등불'을 5권까지 만들었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전략첩보 훈련을 받고 사지로 나갈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눈물로 조국의 제단에 바치는 '제단'을 또 2권까지 마무리했다. 그는 모국어 사랑을 그렇게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훗날 부산 피란시절, 그 전쟁 통에서도 '사상계'잡지를 발간했다니 '등불'과 '제단'에서 이미 선생의 싹수가 엿보인 것이리라.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내놓은 출정 직전에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지 않았다면 아마 '사상계'는 물론 '돌베개'도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