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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 칼럼] 재벌 손자에게도 공짜밥 먹이는 까닭

'닭과 달걀의 선후' 따지는 저급한 무상급식·보육 논쟁

지금은 백 년 후를 내다본 올바른 복지 프레임 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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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효과'란 게 있다.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거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가 1950년 찍은 영화 '라쇼몽(羅生門)'에서 유래한 용어다. 살인사건에 대한 당사자의 진술이 제각각 다르다. 강도는 "사무라이의 아내를 겁탈했는데, 그 아내가 이런 치욕을 당했으니 남자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해서 사무라이와 당당히 검투를 한 끝에 죽였다"고 진술했다. "강도가 사라진 후 남편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경멸을 발견하고는 분노해서 찔러 죽였다"는 건 아내의 진술. 영매사에게 불려나온 죽은 사무라이의 진술은 또 다르다. 겁탈당한 아내가 강도에게 같이 도망치자고 해서 치욕감에 자살했다는 것. 사건을 신고했던 나무꾼은 "사무라이의 아내가 남편과 강도 모두에게 남자답지 못하다고 모욕해서 마지못해 결투하다 사무라이가 죽었다"고 또 다른 주장을 편다. 인간의 인식이란 게 얼마나 허약한가를 성찰하는 철학적 주제의 영화다.

영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둘러싼 논쟁 때문이다. 논쟁에 불을 지핀 건 홍준표 경남지사다. 경남도가 지원하는 급식비의 용처에 대해 경남교육청이 감사를 안 받겠다면 돈을 못 주겠다는 거다. 교육청이 도의 산하기관도 아닌 데다 법적 근거도 없는 터에 느닷없이 감사 타령을 하는 건 까탈 잡으려는 시도로 비친다. 어쩌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는 노회한 '노이즈 마케팅'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 문제가 중앙 정치무대로 비화했다. 교육부가 영·유아 보육비 지원사업인 '누리과정'에 드는 예산 전액을 각 시·도교육청이 떠맡으라고 요구하자 교육감들이 난색을 보인 것과 맞물려 '무상급식·무상보육' 논쟁으로 번졌던 것. 정부 여당이 '무상급식이야 중단되든 말든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사업인 누리과정 예산은 꼭 배정해야 한다'고 연일 압박하자 야당은 지난 몇 년 동안 지자체들이 탈없이 시행해 오던 무상급식을 그만두라는 것이냐고 반발한다. 이 와중에 청와대가 누리사업은 대통령 공약으로 법적 근거가 있지만 무상급식은 지자체가 알아서 해온 사업이니 누리사업이 우선이라고 맞받아쳐 논쟁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야당이 무상급식도 박 대통령 공약이 아니냐고 다시 맞받아치자 청와대와 여당이 부인하면서 사태가 진실논쟁 비슷이 흘러가고 있다. "(무상 급식은) 지자체마다 형편과 사정이 다 있어서 거기에 맞춰서 하면 된다", "희망하는 초등학생에게 급식과 방과 후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게 대선 전후 박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걸 놓고 야당은 무상급식이 대통령 공약이 아니냐고 공격하고 여당은 "공약집에 들어 있지 않으니 아니다"고 발뺌하는 거다. 같은 사안, 같은 발언을 놓고 해석이 이렇게 다르니 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라쇼몽 효과'의 전형이 아닐는지.

제3자의 눈으로는 이 논쟁이야말로 무책임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다. 아니,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이 하나는 꼭 해야 하고 하나는 포기해도 되는 옵션인가? 애가 자라서 유치원에 가고 더 크면 학교에도 가는 거다. 같은 아이인데 유치원은 공짜로 해주고, 학교에 들어가면 돈 받겠다는 건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부질없는 논쟁 아닌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현대 복지의 모토를 실천하겠다면 둘 다 꼭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와중에 새누리당은 "재벌 손자에게까지 밥을 공짜로 먹이는 게 옳나?"하는 왕년의 주장을 우려먹는다. 야당은 질세라 "형 밥그릇을 빼앗아 동생 우유를 먹인다는 게 말이 되나?"하고 맞받는다. 예산이 모자라니 중요도와 시급성을 따지기는 해야 할 게다. 그런데 나더러 굳이 판정하라면 청와대와 정부의 주장이 더 억지스러워 보인다.

둘 다 필요한 사업이라면, 그 동안 해 오던 건 진행하되 후발사업은 재정 형편을 따져가며 가능한 범위에서 제대로 실시하려고 노력하는 게 정상 아닌가? 대통령 공약사업이라고 해서 탈없이 해오던 다른 사업을 억지로 중단해야 할 상황으로 몰아넣는 게 과연 온당한가. 기초연금이니, 4대 중증질환 보험 적용이니, 다른 공약은 잘도 줄이고 깎더니 왜 이건 꼭 해야 한다면서 지자체에 부담을 지우는지 납득하기도 쉽지 않다. 꼭 계속 해야겠다면, 대통령 공약사업이고 하니 전액 국비로 하는 게 옳다. 왜 돈도 없는 지자체더러 무상급식에 쓰던 돈을 무상보육에 돌리라고 강요할까.

"재벌 손자에게까지 세금으로 왜 공짜밥을 먹이느냐"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왜 먹이느냐고? 초·중학교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이다. 헌법에도 의무교육은 무상이라고 돼 있다. 그게 옳다면 무상으로 지급되는 교과서도 재벌 손자에겐 돈을 받아야 할 게 아닌가? 방과후 수강비도 사교육비 수준으로 받아내야 할 게 아닌가? 수업료는 왜 양껏 받아내지 않나? 왜 밥만 문제인가? 재벌에게 온갖 혜택을 몰아주면서 "재벌 손자에게 왜 공짜밥을 먹이냐"며 사려깊고 공평한 체하는 여당의 주장은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격이다. 얼핏 그럴싸하지만 보편복지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지금 해야 할 건 현재와 미래의 나라 살림을 계량해 온전한 장기 복지프로그램을 짜는 일이다. 사업의 중요도와 시급성을 따져 언제까지는 어떤 일을 하고, 그 다음 차례로는 어떤 일을 착수하겠다는 로드맵을 짤 때다. 꼭 필요하다면 국민을 설득해 증세도 해야 한다. 더 가진 이에게 조금 더 거두기도 해야 한다. '증세 없는 복지 확충'이란 형용모순에 매달리니 매듭이 자꾸 꼬이지 않나. 선거 때만 되면 하늘의 달이라도 따줄 듯이 흰소리 치다가 공약 파기를 밥 먹듯 하니 국민의 불신이 생기지 않나. 멀쩡히 잘 해오던 걸 중단시키고 제 것만 관철시키려니까 갈등이 생기지 않나.

정부와 여야는 저급한 논쟁을 당장 멈춰야 한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라도 따를 만한, 백 년 후를 내다보는 현실적이고 타당한 '복지 프레임'을 만들 일이다. 선진국 어디에서고 복지를 이렇게나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꼴을 보지 못했다. 지금 벌어지는 복지 논쟁이야말로 우리 정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벌거벗고 거리에 나선 동화 속의 임금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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