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한마음 비빔밥' 행사가 열렸다. 단순히 밥과 나물만 비비는 건 아니었다. 긴 고난의 시간을 버텨온 눈물과 회한, 다시 회생해 자리를 함께한 기쁨과 환희, 그런 걸 함께 섞는 행사였다. 노사는 물론이고 지역주민들까지 자리했다. 화합과 새로운 출발을 기원하는 비빔밥 500인분은 그렇게 마련됐다.

한진중공업의 고난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행사는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4년 전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났던 300여 명의 휴직자가 오롯이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일감이 없어 텅 비었던 공장에는 발길들이 부산해졌다. 잇단 선박 수주로 생기를 되찾은 모습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어윤태 영도구청장 등 내빈들도 참석해 한껏 축하해 주었다.

비빔밥도 그러려니와 작은 선물꾸러미도 기쁨을 더했다. 안진규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쌈짓돈을 내어 생활필수품이 든 선물세트 1000개를 마련했다. 작으나마 이웃들과 정을 나눌 수 있으니 그 또한 흡족한 일이었다. 지름 2.5m의 대형그릇에 든 500인분의 '한마음 비빔밥'을 대형 나무주걱으로 뒤섞는 모습은 화합의 상징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안 사장은 "영도조선소의 심장이 다시 뛰는 감격스러운 순간"이라며 부산시민과 지역 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새 출발의 의지를 다졌다. 새누리당 김 대표도 무척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 다들 건강하게 돌아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한진중공업의 어제와 오늘은 부산경제의 압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날 행사가 또 각별했다. 알다시피 한진중공업은 대한민국 최초의 조선소다. 1937년 조선중공업으로 출발한 뒤 올해로 87주년을 맞는다. 세계 1위의 조선 강대국은 한진중공업이 토양이 되고, 거름이 되고, 씨앗이 됐다. 기술과 노하우, 인력이 퍼져나가 오늘날의 영광이 된 것이다.

옛 영화는 영원히 지속되진 않았다. 선박의 대형화가 한창 진행될 무렵, 위기가 서서히 도래했다. 공장 증설 부지를 달라고 했으나 부산시는 땅을 마련하지 못했다. 한진중공업이 부산을 떠나니 마니 시끄러웠다. 그래도 부지는 마련되지 않았다. 급기야 필리핀 수빅만에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고 2008년 가동에 들어가자 불안감은 더 커졌다.

수빅공장은 부품을 부산에서 주문함으로써 지역경제에는 상당한 도움이 됐다. 한진중공업으로서는 어려운 시절 위기를 넘기는 방편이 된 것도 사실이다. 반면 영도공장의 노사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다들 덤핑으로 수주를 하던 시절이었다. 회사는 손해나는 수주를 거부했고 갈등은 커져만 갔다.

한진중공업에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친 것은 2011년 1월 초순이었다. 선박 주문 물량이 떨어지고 중국의 가세로 수주 단가가 급락해 공장을 가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박 수주 감소는 곧 대규모 적자를 의미했다. 심지어 완공한 배를 선주사가 인수해 가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위기 상황에서 회사 측은 구조조정에 나섰고 근로자들이 극력 반발하면서 갈등이 첨예화됐다. 생산직 근로자 400명의 정리해고가 통보되자 노조는 파업으로 맞섰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여성 지도위원 1명의 타워크레인 농성은 사태 장기화의 상징이었다. 세 차례에 걸쳐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매번 1만여 명씩 농성을 하면서 한진중공업의 작업은 올스톱됐다. 시위 때마다 영도로 통하는 부산시내 도로도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1년 가까이 이어진 노사 대립은 국회와 각계가 나서면서 그해 11월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2012년 재정비와 준비기간을 거친 한진중공업은 2013년부터 지금까지 2년5개월여 동안 놀라운 수주 성과를 올렸다. 영도조선소와 수빅조선소를 합해 83척, 53억6000만 달러(약 5조9500억 원)어치 수주라는 기적을 일구어냈다. 이 기적의 밑바탕에는 노사 화합이 깔려 있다. 극심한 노사 대립은 역설적으로 위기 극복의 토대가 됐다.

글로벌 조선시장의 침체 속에 한진중공업은 공격적인 수주 전략을 폈다. 유럽 등지의 세계적인 조선, 해양박람회에 임직원을 대거 파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기존 선주와의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고 새 선주를 확보하기 위해 세일즈트립 방문단을 편성해 세계곳곳을 누볐다.

정성이 극진하면 하늘도 운다고 했던가. 고난의 세월이 지나고 비빔밥을 나누며 화합을 다짐하니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결국 회사는 약속을 지켰고 근로자들은 소중한 일터를 다시 찾게 됐으니 다행스럽고 또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는 플랜트 산업 등 새로운 분야에도 진출해 한진중공업이 더 큰 기업으로 성장했으면 한다. 향토기업의 성장은 곧 부산과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토대가 아니겠는가. 손발이 건강해야 심장이 강건하고, 머릿속도 가지런해지는 법이다.

은산해운항공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