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으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벌써 12월이라니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인데, 추위를 두려워하는 나는 찬바람에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선다.

가끔 구두를 손질하러 길가 작은 수선가게에서 일하는 마음씨 좋은 어르신에게 들른다. 그분은 장애인이라 말이 어눌하지만,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고 손님을 맞이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근처에서 붕어빵을 사서 수선가게 아저씨와 나눠 먹기도 하고 길거리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드리며 구두 고치는 솜씨를 구경하기도 한다.

"아저씨, 힘들지 않으세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건네며 말을 걸면 "조금요. 날씨가 상당히 덥거나 추우면 비좁은 가게 안에서 작업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하루에 일거리가 두세 건만 있어도 충분해요. 제가 몸이 이러니 빨리 해낼 수도 없고요"라고 손에 잡은 일감을 부지런히 만지작거리며 대답한다. "하루에 두세 건 있는 일거리로 생활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쭤보니 "우리 동네 적십자봉사회가 매달 쌀이랑 반찬을 보내옵니다. 어버이날에 선물도 가지고 오고 김장철엔 김치도 갖다 주고 가끔 들러서 오래 묵은 이불도 빨아주고 덕분에 외롭지 않게 지내요"라고 답한다.

나는 입에서 '나도 적십자 봉사원이에요'란 말이 불쑥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나도 가끔 명절 때 선물 들어온 쌀이나 김 멸치 등을 그 아저씨에게 보내고 주변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한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앉아 있던 나는 적십자 자문위원으로 20년간 활동한 것이 가슴 뿌듯했다. 적십자의 활동이 우리 주변의 고단한 삶을 지켜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난 1일부터 부산적십자사 부회장이라는 과분한 직책까지 맡아 할 일이 더 늘어날 것 같아 어깨가 무겁다.

적십자는 수입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모 없이 손자를 키우는 조손가정에 매월 생활비를 보내고 수술비가 없어 애태우는 급한 환자에게 병원비를 보태주기도 한다. 한국에 시집온 다문화가정 산모가 출산할 때 산모용품과 함께 적십자 봉사원이 찾아가 친정어머니 역할도 한다. 세계 곳곳에 재난이 나면 전 세계 189개국의 적십자사는 힘을 합쳐 돕는다. 국내에서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발생했을 때나 집중호우, 화재 등 재난이 있을 때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원들이 맨 먼저 달려나가 재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모은다. 북한과의 대화에도 앞장서 이산가족을 돕는 일에 두 팔을 걷고 힘을 모으고 있다. 평시에는 국내의 취약 아동·청소년과 노인 등 5만 세대와 결연을 하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어려운 이웃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펼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재원이 시민이 내는 적십자 회비이다. 한 사람의 적십자회비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든 일의 씨앗이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전국 16만 봉사원의 힘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물질적 풍요는 가져왔으나 인간 사랑의 샘은 메말라가고 있어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이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그늘진 곳을 보살피는 사랑의 손길은 더욱 절실하다. 내년 부산지역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크고 작은 재난상황도 발생할 것이고, 위기에 빠진 가족과 개인들이 간절한 도움을 기다릴 수도 있다. 이때 적십자사와 적십자 봉사원들은 가장 신속하게 이재민과 위기가정을 위해 시민을 대신해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펼칠 것이다. 적십자회비로 모아준 온정의 손길이 적십자사를 통해 이재민과 위기가정을 보호하는 방패막이 돼 기적을 보여줄 것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20대와 40대의 절망사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떠받치는 적십자 봉사원들의 활동이 늘어나고 긴급생계지원과 의료지원을 하는 적십자 위기가정 지원이 늘어난다면, 생활고로 짓눌린 40대 가장들이 한숨 고르며 극단적인 선택을 피할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우리는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어느 집에 먹을 것이 없으면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서로 나누는 마음이 있었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적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작은 마음을 보탠다면 우리 사회의 절망지수를 낮추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올 한 해도 저물어간다. 이 추위에 떠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적십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아저씨와 따뜻한 대화를 끝내고 포장을 걷어 올리며 나온 나를 쌩하니 찬바람이 맞아준다.

부산적십자사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