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30일간 혼자 아르헨티나를 여행했다. 2년 전 쿠바 여행 때 야구경기를 관람하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쉬워 이번에는 축구경기를 보겠다고 마음먹었고, 운 좋게 귀국 사흘 전 시즌 개막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수료가 잔뜩 붙어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고가로 판매되는 리베르 쁠라떼(River Plate) 팀의 티켓을 덥석 구매했다.

리베르 쁠라떼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지로 하고 있으며, 동일한 연고지의 팀 보까 후니오르스(Boca Juniors)와 오랜 라이벌이다. 두 팀이 맞붙는 경기는 수뻬르끌라시꼬(El Superclasico)라 불리는데, 영국 일간지 옵서버가 '죽기 전에 봐야 할 스포츠 경기 50' 중 1위로 선정했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더비 중 하나다.

리베르 쁠라떼의 팬덤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해 말 일본에서 열린 '2015 FIFA 클럽 월드컵'에는 리베르 쁠라떼 팬 1만5000명이 지구 반대편으로 약 2만 ㎞를 날아 응원을 왔다. 4강전이 있기 전날, 경기장 주변에 수많은 응원 현수막과 문구 등을 내건 팬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그중에는 경기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팀 유니폼을 입고 일본까지 응원 온 시각장애인도 있었다. 영국 일간지 미러는 "자가용을 팔아 일본 원정을 온 리베르 쁠라떼 팬들도 있다"며 "그들은 '전 세계 최고의 팬'이란 타이틀을 가질 만하다"고 보도했다.

드디어 경기 당일, 부푼 마음으로 일찌감치 경기장 인근에 도착하자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시간당 200㎜는 될 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은 세찬 물줄기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아우성을 치며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1㎞가 당시에는 수십 ㎞처럼 느껴질 만큼 고통스러웠다. 앞이 안 보여 넘어진 사람, 세찬 빗줄기에 안경이 벗겨진 사람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물지옥을 뚫고 경기장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시간은 경기 1시간 전인 오후 6시. 1시간 이상 반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그 비를 쫄딱 맞고 앉아 있으니 너무 추워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제 아르헨티나 축구, 그것도 최고 명문 리베르 쁠라떼의 경기를 본다는 설렘도, 거금을 주고 구입한 티켓에 대한 미련도 없다. 그저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 정도 비라면 서둘러 경기 취소가 공표되었어야 하는데 관중은 계속 경기장을 채워가고 있고, 응원가도 점점 커지고 있다. 오후 7시30분이 되자 경기 취소와 다음 날 재경기가 발표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폭우 속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수만 명의 관중이 경기를 시작하라며 경기장이 떠나갈 듯 한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어느 한 명 경기장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다 정말 경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음 날은 카니발 기간이라 휴일이고, 오늘 티켓으로 내일 입장할 수 있는데 이 사람들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아르헨티나 축구의 힘이구나.

클럽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팬들과 훌륭한 라이벌 팀의 존재는 선수들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그것이 아르헨티나 축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 축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감독, 선수, 축구협회 등에 대해 비난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얼마나 '좋은 관중'이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이는 비단 축구뿐 아니라 모든 종목에 해당하는 얘기일 것이다. 다음 날 리베르 쁠라떼는 상대 팀 낄메스AC를 상대로 5-1 대승을 거뒀다.

동서대 레포츠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