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듯 짧게 지나가는 봄은 매년 아쉽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 봄은 더욱 짧게 느껴져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나른한 아지랑이 같다. 다행스럽게도 전국에서 매년 역사 속 아름다운 과거와 함께하는 봄 축전들이 개최되면서 그 아쉬움을 기억 속에 한 자락 붙잡아 준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가 아름다운 빛과 공연과 전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 숨을 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봄은 지극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의 뇌리에 기억된다.
문화재청은 매년 봄 국민의 높은 관심 속에 조선 시대 궁을 이용한 야행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올해 2회째인 궁중문화축전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축전은 조선 시대의 사대 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종묘 등지를 걸으면서 듣고 보면서 즐기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달빛을 받으며 걷는 창덕궁 달빛여행은 궁중 후원에서 역사에 등장하는 왕과 왕비, 궁녀들의 정사와 비화를 들으며 오감으로 즐기는 시간여행이다. 마치 내 옆에서 그들이 함께 걷는 듯이. 올해는 비로 취소되었지만, 국보 224호 경복궁 경회루에서 이루어지는 야간 음악회의 아름다운 밤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갑자기 경복궁 흥례문이 흔적조차 없어지고 선과 점, 푸르고 붉고, 보랏빛으로 물들여지는 미디어 파사드는 그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에 탄성조차 내쉬기 어렵게 한다.
도시화한 서울이 국제적 관광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시샘하듯 계속 높아지는 고층빌딩 숲에서가 아니라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 500년을 대표하는 궁전과 그 역사가 문화와 만나기 때문이다. 이를 지자체가 접목하여 성공한 축전이 지난해부터 서울에서 시행하는 정동야행으로 한 해 만에 10만 명 이상이 즐기는 대표적인 행사로 발전하고 있다.
부산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아름답고 국제화된 대표적인 해양도시이다. 그러나 매년 수영구 광안리해수욕장과 해운대에서 개최하는 부산불꽃축제와 부산국제영화제를 제외하면 밤에 즐기는 축전은 연등회가 거의 유일하다. 부산은 우리나라와 전 세계 사람에게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을까? 아마도 젊은이들에게는 바다 배 요트 해운대 등 바다와 연관된 다이내믹한 낮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며, 어묵 씨앗호떡 부산밀면 돼지국밥 같은 먹거리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 거의 60대 이상에 해당하는 한국전쟁기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부산은 전쟁 피란처 전차 임시수도로 인식되고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와 영도다리에서 만나는 피란민에 대한 기억은 이제 서서히 오래된 노랫가락 속에서, 그리고 추억 속에 박제된 이미지만으로 박혀 있다. 몇 년 전 1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한 것은 전쟁과 피란 속에서 고단한 삶을 치열하게 산 아버지의 인생이라는 진정성이 통하였기 때문이다. 이 힘이 또 하나의 부산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박제된 역사를 새로운 이미지와 미래 가치로 탈바꿈시키는 문화축제로 생성되고 있다.
서울이 그렇듯, 부산 역시 바다나 해운대의 빌딩, 불꽃 축제, 영화제만으로 국제적 도시가 될 수 없으며 세계인에게 각인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근대 문화재와 이미지, 한국전쟁과 피란수도라는 단어가 결합한다면 부산은 달라진다. 이것이 문화의 힘이며 역사가 남겨 준 부산의 미래 비전이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 1128일 가운데 1023일 동안 부산은 우리나라 임시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수도였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부산이 우리나라 수도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역사적 도시가 된 것이다.
부산의 원도심 지역인 서구와 중구는 근대문화재가 집중된 지역으로 단장하지 않은 원초적인 속살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서구청과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은 부산시의 후원으로 올해 문화재청이 시행한 야행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 그 첫 번째 축전인 '피란수도 부산 야행'이 다음 달 3일과 4일 저녁에 부산임시수도청사인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임시수도기념거리 그리고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서 거행된다. 이에 앞서 지난 24일에는 피란수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임응식사진전'이 개막됐다. 밤에 즐기는 부산 근대 문화 축전 '피란수도 부산 야행'이 곧 펼쳐질 것이며, 부산의 과거가 현재와 만나 미래 가치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는 부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부산, 살아 있네!
동아대 석당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