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정운호 수사에서 시작된 법조비리 의혹은 각각 검사장과 부장판사 출신인 스타급 변호사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뇌물과 관련된 변호사법 위반인지, 세금을 포탈한 조세범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일단 거론되는 액수는 50억, 100억 원 단위로 그야말로 '억'소리를 나게 한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히 거론되던 전관예우의 전형이기도 하지만 그 규모의 엄청남에 비난이 쇄도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 이에 서울변호사협회는 검·판사로 임용되면 정년퇴임 때까지 검·판사를 하게 하는 방안을 대책으로 연구 중이라 밝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업자인 법조계 안팎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 제한이라 거니, 그들이 자초한 일이라 거니 수군거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비동업자인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무슨 근본적 대책이 된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사례 2. 지난해 재계 서열 5위의 롯데그룹에서 볼썽사나운 형제의 난이 벌어지고, 황금알을 낳는다는 면세점 재심사에서는 잠실롯데면세점이 탈락했다. 충격은 혼란으로 이어졌고 하루아침에 오랜 일자리를 잃게 된 종사자들의 안타까움이 부각되며 제도가 가장 큰 문제로 지목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어떤 이유와 경과가 있었던지, 마침내 검찰이 대규모 압수수색을 시작하자 그룹 전체가 요동치는 구린내가 군데군데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이 와중에 지난 형제의 난에서 밀린 듯하던 한쪽이 기다렸다는 듯 경영권 분쟁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네들의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지극히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집에 외우(外憂)가 닥치면 일단 안에서의 다툼은 미뤄두고 기둥뿌리가 빠지지 않도록 밖의 일에 일치단결하여 대처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감추거나 불복하라는 뜻은 아니고, 겸허히 대처해 특히 일자리는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게 해 애먼 사람 잡지 말라는 것이지만 참, 싹수가….
하긴, 재계 서열 5위 그룹의 오너 가족이자 대주주라는 이가 일개 화장품 매장 입점을 빌미로 수억 원 단위의 뒷돈을 받았다는 소리가 나올 때 그 '구멍가게급 싹'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또 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롯데시네마 매점 비자금 의혹이다. 자신들의 영화관을 찾는 손님에게 '위생을 위한 외부음식 반입금지'라는 명분으로, 그 원가는 세상이 다 알 수 있음에도 엄청난 바가지 판매가로 연간 수백억 원의 이익을 얻었는데 또한 총수 일가가 주인인 회사였다.
돈을 버는 일에 범죄만 아니라면 수단을 탓하기에는 멋쩍은 세상이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최상급'의 품위는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자신들의 영화관을 찾아주는 고마운 손님들에게 감사와 서비스 차원에서 적당한 이윤이나 붙이고, 또 그 이익은 영화발전기금쯤으로 썼다면 얼마나 '폼'나고 존경을 받았을까. 그런데 서열 5위의 주인이라는 이들이 기껏 팝콘·음료수에까지 혀를 대 뒷주머니를 챙기시다 도마에 오르셨다니, 참….
들으면 복장 터지고 살맛 떨어질 이야기를 주저리 늘어놓은 것은 그들을 비난하려는 분노보다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말하려는 뜻이다.
첫 번째는 100세 인생 전부가, 시작인 20·30대에 결정되는 구조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임용되면 정년까지 검·판사를 하게 한다는 것은 대책도 개혁도 아닌 기득권을 고착화시키자는 집단이기의 발상일 뿐이다. '그렇게 정년까지 자리를 지키면 문은 더욱 좁아질 텐데 그 다음은 어찌 하려고'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한 번 합격하면 평생을 우려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의 한계라니, 차라리 무섭다. 로스쿨과 사법시험 존치의 치열한 다툼도 결국은 집단의 밥그릇 싸움 아닌가.
비단 법조계만의 일이 아니다. 어느 대학을 나와 어떤 시험을 치르고 첫 직장이 어디냐가 평생을 결정짓는 구조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평생이 걸린 일인데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걸 해내야지 나중으로 미룰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청춘이 시들고 덜컥 나이 제한에라도 걸리면 그때는 일단 사회적 불만부터 품게 될 테니, 그게 지금 우리 사회에 부글거리는 분노의 원인이고 희망이 사라진 까닭이다.
유연한 구조여야 한다. 비단 개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50대 60대가 되어서도 그간의 사회적 경험과 양심으로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고 싶으면 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 젊어서는 다른 꿈이나 현실의 한계로 이루지 못했지만 뒷날 간절하면 고위공무원이나 외교관이 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어야 한다. 조직 또한 마찬가지다. 한 번 들어서면 변화나 도전보다는 답습과 복종으로 안정을 보장받는 구조에서 혁신과 발전은 요원한 노릇이다. 그렇지만 기득권의 철옹성을 깨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두 번째는 근본적 변화의 시도에서 비롯되는 후유증이나 반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는 일자리이다. 그러니 일자리를 내세우면 무조건 주춤하게 된다. 잠실롯데면세점이 문을 닫아 기존 종사원들이 직장을 잃었다면 그만큼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는 다른 면세점을 늘려야 한다.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이 허가의 특혜라는 발상 자체가 문제의 시작이었고 그것은 허가권자의 기득권 사수의지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국가가 먼저 권한을 내려놓겠다는 의지가 일자리를 비롯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득권의 반발을 깨트려 유연한 변화를 유도하고 희망과 활력을 되찾기 위한 부정부패 척결에는 국가의 권한은 엄정하고 때론 가혹해야 된다. 영화관 매점의 폭리는 비단 한 곳만이 아닌 전체의 현상이다. 여태껏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더 문제이다. 단순히 비자금뿐 아니라 사회적 염치와 상류의 도덕 문제까지 밝히는 가혹한 엄정으로,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공사(公私) 모든 세력을 위협해야 유연한 희망의 사회를 기대할 수 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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