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딸아이가 작은 음악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른바, 최초로 사교육 장(場)에 진입한 셈이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했던가? 교육학박사 아빠도 한국사회의 사교육 광풍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물론 이 말의 진의는 사교육의 역기능을 과장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사교육이 공교육을 보완하는 순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한국 교육이 고착화된 입시 전선(戰線) 속에서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음을 함께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최근 입시 중심의 교육을 직핍하게 비판하고 있는 장편소설이 나와 주목을 끈다. 한국 서사문학의 거장 조정래 소설가의 '풀꽃도 꽃이다'(2016·1, 2권)가 그것이다. 글로벌 정치경제의 흐름 속에서 중국의 위상과 새로운 동아시아 연대의 필요성을 설파한 '정글만리'(2013·1~3권)가 나온 지 3년 만이다. 한국 현대사의 이념과 존재 양식을 탐구해 온 그가 새롭게 주목한 이슈는 한국사회 내부의 '교육 문제'다. 조정래는 한국 교육의 뿌리 속에 여전히 '식민 잔재'가 존속해 있다고 말하면서, 국가를 창조적으로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교육적 가치가 혁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소설은 강교민 교사와 학교장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두 인물의 대립은 단순히 인물과 인물 사이의 외적 갈등이 아니다. 이 장면은 '행복 성장'이라는 교육의 본질적 가치와 '경쟁 성취'라는 현실적 조건 사이의 사회적 갈등 양상을 담고 있다. 그래서 '풀꽃도 꽃이다'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갈등은 교육적 이념을 둘러싼 첨예한 '가치 투쟁'과 다르지 않다. 이는 주인공 강교민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인물의 대립 양상이 주로 '대화'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소설 속 대화는 작가의 주제 의식을 직접 표출(tell)하는 담화표현 방식 중 하나이다. 이러한 언술 전략은 '강력한 교육 민주화'(강교민)라는 주제의식의 강화, 혹은 교술(敎述)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서사 장르의 미학적인 측면만을 놓고 보자면, 서술자의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되는 계몽적 내러티브는 고차원적인 서술 전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근대적 이야기 장르와 구분되는 현대소설은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핵심 요소의 치밀한 구성 작업을 통해 서사물의 미적 수준을 배가시키는 언어예술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손쉽게 퇴행적 '계몽 서사'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작가와 텍스트의 생산관계를 고려하지 못한 일면적인 감상과 평가일 뿐이다. 수십 년 동안 소설을 써온 작가가 소설 창작의 작법을 몰라서 이러한 서술 전략을 택했겠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왜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택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는 조정래 소설가의 '리얼(real)'한 현실감각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뛰어난 작가는 세월이 흘러도 현실감각이 마모되지 않는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조정래의 작품 세계는 '노년문학'과는 무관하다. 그는 어긋난 현실에 관조하는 삶이야말로 작가의식의 퇴행을 자인하는 부끄러운 태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조정래는 조화롭고 평화로운 '노년의 삶'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핍진하게 처절한 현실과 마주한다. 그렇기에 '작가 조정래'에게 소설은 '초월'의 메시아가 아니라 여전히 '변혁'적 미디어다.
그의 이러한 삶/문학적 태도를 '변혁적 계몽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런 비평적 술어 따위가 아니다. 핵심은 우리 사회에 부조리와 모순이 존재한다면, 문학예술의 수사학적 성취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적 실천 의지이다. 그렇다면 조정래가 제시하는 한국 교육의 새로운 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적 가치'의 회복이다. 좋은 교육은 제도적 '장치'의 보완만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교육적 '가치'의 복원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사상적 전언이다. 그래서 그는 생존 경쟁에 지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 해, 굶지 않아"라고 따뜻하게 말하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내년이면 딸아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무엇을 알려주고, 무엇을 길러줘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해"라는 저 도저한 문장의 교육적 가치만은 반드시 기억하려 한다. 분명 풀꽃은 미미하고 연약하다. 풀꽃은 아직 그 아름다움을 뽐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약한 풀꽃 속에 온 우주의 생명과 진리의 기운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신뢰, 어쩌면 이러한 충실한 사랑과 믿음이야말로 조정래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소중한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저기, 어두운 모퉁이를 돌아 우리의 '풀꽃'들이 환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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