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동래성 주변 도시철도 예정지에서 유골과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두개골이 함몰된 어린이, 처형당한 흔적이 있는 여인…. 해자에 파묻힌 유골들은 당시의 참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징적인 것은 남자의 평균 키가 163.6㎝에 달한다는 점이다. 일본인보다 8㎝, 국내 다른 지역보다 큰 것으로 드러났다. 치아로 보아 영양 실조 상태인 데도 기골이 장대했다는 이야기.

1592년 음력 4월 13일, 왜군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당시 동래성에 3000, 부산진성에 6000명의 군사가 있었다. 한데, 성이 함락되는 데는 단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금정산성만 있었더라면…. 산성은 110년 뒤에야 축조됐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임진왜란에서 부산의 전투는 대단히 의미가 깊다. 참혹한 패전이었다. 구평동 일대의 서평포, 다대포의 윤흥신 장군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렇긴 한데 7년 전쟁에서 정발, 윤흥신, 송상현처럼 한 지역이 모두 옥쇄를 감행한 기록은 유일하다. 특히 송상현은 문관으로 첫 순절자가 됐다.

부산의 뿌리는 뭘까? 그 절심함에 대한 답을 찾은 게 임진왜란이다. 부산의 뿌리는 대단히 모호하다. 장산국은 서기 80년 울산의 우시산국과 함께 신라에 복속됐다. 아리송한 것은 장산국과 가야의 관계. 장산국의 토기, 철기, 매장 문화는 모두 가야와 동일하고 신라와는 다르다. 예전에 음식을 먹기 전에 밥 한 술을 떠 '고씨례' 하며 주변에 뿌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게 장산의 고씨 할매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느낌이 묘하다. 그만큼 가야와 장산국의 관계는 밀접하다.

장산국의 실체도 모호하긴 마찬가지. 도읍지가 동래라는데 장산과 동래 사이에는 수영강이 가로막고 있다. 일전에 망미동에서 왕궁터가 발견됐는데 거칠산국의 도읍지라 했다. 장산과 동래, 망미동의 관계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장산국은 금관가야와 밀접한 관계지만 신라 초기에 맨 먼저 복속됐다. 532년 금관가야, 562년 대가야 멸망과는 450년 이상 시대 차이가 있다.

여기서 가야, 장산, 신라의 관계를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김종성의 '철의 제국 가야'를 보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철기문화를 가져온 북방세력, 즉 흉노족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북방의 천신족과 남방의 해양족의 결합체가 가야라는 풀이다.

신라의 4대왕인 석탈해는 캄차카 반도 출신으로 추정했다. 가야에 도착한 탈해는 김수로왕에 패해 서라벌로 가 공주와 결혼한 뒤 4대 왕이 된다. 철기 제조법이 그 연결고리라고 한다. 당시 장산국 역시 철기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금관가야-장산-신라로 이어지는 철의 전파로 볼 때 가야와 장산국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장산의 멸망이 신라 석탈해왕 때 이뤄졌으니 여하간 기묘한 관계다.

신라에 편입된 이후 부산은 역사에서 종적을 감춘다.부산이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게 임진왜란이다. 전쟁의 시발점이었고 왜군의 주둔지였으며 전쟁이 종결지였다. 이후 일본의 조선 병탄의 출발지가 됐고 6·25 전쟁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부산이 형성된 셈이다.

임란 7주갑인 2012년을 앞두고 한때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후 주춤하던 사업은 지난 3월 부산시가 북항 재개발지에 국립임란박물관을 짓기로 함으로써 다시 부각됐다. 곧 부산발전연구원의 용역 결과가 나온다니 기대가 된다. 사단법인 '임진왜란 정신문화 선양회'란 게 있다. 선양회 이사인 유완식 세무사는 전국 각지에서 임란 추모나 학술행사가 끊이지 않는데 부산만 유독 잠잠하다며 답답해 했다. 임란의 시작이자 끝인 부산의 뿌리 찾기 작업이 시급하다는 주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뿌리 찾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오랜 과거가 쌓여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지역이든 뿌리의식은 곧 신념체계와 연결된다. 인간의 두뇌에는 원시 시대부터의 진화 과정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인격체는 숱한 조상의 형질과 생후 경험의 결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이라고 뭐 다를까 싶다.

부산 울산 경남의 인구는 대구 경북보다 300만 명이 많다. 한데, 정치적 위상은 늘 밀린다. 왜 그런가. 그 원인을 뿌리의식에서 찾는 건 과언일까. 임진왜란만 해도 그렇다. 유성룡, 김성일의 출신지인 안동은 물론이고 대구, 경북 곳곳에서 임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구미에선 고려 말 야은 길재의 학맥이 대왜 항쟁의 주축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사림의 중심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산은?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상'을 기억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 때 영국군에 항복한 뒤 희생양으로 나선 6명의 시민을 기념한 조각이다. 결국 목숨을 구했지만 6명의 부자, 법률가, 귀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했다 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칼레에 비해 부산이 모자라는가. 죽음으로 고수한 임란의 저항 정신은 칼레의 시민보다 100배는 진하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