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기말고사를 마치고 '한국영상매체와 스토리텔링' 수강생들과 영화를 보러 갔다. 세상이 온통 거꾸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학생들이 있어 조금은 힘이 난다. 매서운 추위에도 대학가의 끝자락에 위치한 영화관까지 가는 길은 따뜻하고 즐겁기만 하다. 이날 학생들과 보기로 한 작품은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이다.

영화 '판도라'는 올 상반기에 개봉한 '부산행' '터널' 등과 궤를 같이하는 재난 서사물이다. 이른바 '재난 3부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들 작품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모티프는 생명과 안전에 대한 국민의 '공포(Fear)'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 따르면 '불안'과 '공포'는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불안'이 예견 가능하거나 예측 가능한 것들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공포'는 측정 불가능하거나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무차별적이고 불확실한 사건과 존재에 대한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공포는 개개인의 심적 연약함이나 미약한 정신 상태에서 발현하는 것이 아니다. 바우만이 이야기하는 현대 사회의 공포란 인간 이성의 취약성과 한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철학적인 사건이자 시대사적 증언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도구적 이성에 기반한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것이 바로 타당성과 신뢰성이라는 '객관적 수치'로 구축된 '근대성'의 신화이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세계와 자연의 질서를 통어할 수 있는가? 2016년 한국형 재난영화 3부작이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은 낙관적이지 않다.

먼저 '부산행'은 자연과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함을 무자비한 형질 변형의 죽음 공포('인간'에서 '좀비'로)로 몰아넣으며 질주하고 있다. 다음으로, '터널'은 국가 안전망 속에 포함된 것처럼 보이는 국민(people)의 일상이 어떻게 사회적 안전체계 바깥으로 배제되고 추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판도라'는 '원전(방사능)'의 위험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이중삼중의 안전장치'의 초토화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보는 이들의 죽음 공포를 배가시키고 있다. 실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례는 대중 관객의 파국적 공포를 더욱 현실화한다.

재난 3부작 중에서 한국 사회에 내재해 있는 죽음 공포를 가장 충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은 '판도라'이다. 물론 이는 '원전 폭발'과 '방사성 물질 피폭'이라는 무시무시한 소재의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존재/사건이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수십 기의 원전이 인간이 완벽히 제어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재료('꺼지지 않는 불')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전의 핵심 자원은 눈으로 포착할 수도, 손으로 감각할 수도 없는 불확실한 대상이다. '판도라'의 관객들이 무시무시한 죽음 공포 속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원전 공포'의 형태와 정체를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죽음 공포'의 간접 체험을 구성하는 재난 서사를 '교훈담'(혹은 '죽음의 공개 리허설')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일부 평론가가 '판도라'의 문화적 성취를 '탈핵적 계몽 효과'로 꼽는 것 역시 재난서사의 이러한 주제적 효용성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소재적 무게감에 비해, 선량한 교훈담을 넘어서는 미학적 치열함을 충실히 지속시키지 못했다. 영화 전개부의 강렬하고 폭발적인 이미지와 서사적 긴장은 가족주의를 토대로 한 재난 극복의 휴머니즘으로 해소되어 버리고 만다. '아마겟돈'의 엔딩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주인공 재혁(김남길 분)의 멜로드라마적 죽음은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재혁은 '파국의 상자'를 열어버린 인간의 죄를 대속하듯이 드라마틱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장면에서 '판도라'의 신파적 휴머니즘은 정점에 달한다.

물론 이런 텍스트 비판은 값싼 휴머니즘에 대한 조소가 아니라, '원전'으로 표상되는 한국 사회의 잠재적 공포를 화려한 영상이나 드라마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반성적 사고에 더 가깝다. 인간의 오만함이 초래한 죽음 공포를 속죄적 눈물로 승화시키고자 할 때 우리 사회를 통치하는 '진짜 공포'는 망각되거나 희석화('뜬소문')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다소의 미학적 한계를 고려하면서도, 이 작품의 대사회적 문제 인식(탈핵)만큼은 충실히 이슈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도가니'나 '귀향'의 경우에서 보듯, 대중영화는 미학적 성취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변혁적 담론을 구성하는 현실적 계기로 기능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로운 비판 정신이 존재하며, 그것은 '집단지성'이라는 혁명적 형상으로 우리에게 도래한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 있을지 모를 '유일한 희망'의 잔여물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