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런(Chicken Run). 닭띠 해인 2017년 한국사회의 트렌드로 꼽힌 키워드다.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런'에서 따왔다. 이 영화는 죽을 위기에 놓인 농장의 닭들이 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탈출을 꾀하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이 양계장 닭 같다는 비유다. 울타리에 갇힌 닭들처럼 정체와 불안, 혼돈을 겪게 될 거라는 의미다. 각자도생(各自圖生)도 올해 키워드 중 하나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도 사회도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전제이니 우울하고 씁쓸하다.

이처럼 한국은 불안사회다. 사회 근저에 불안이 관통하고 있다. 현재도 미래도 불안하다. 불안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연대와 통합이 어렵고 자기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심리가 강할 수밖에 없다. 저출산이 심각한 것도 이와 관련돼 있다. 일자리-주택-교육의 3대 민생고에 허덕이는데 아이를 낳아 기르기가 두렵다. 출산파업이란 자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보육을 나라가 책임지는 유럽 복지국가들이 부러울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가계부채는 갈수록 불어난다. 노동자가 생명을 끊으면서까지 생존권을 외친다. 얼마 전에는 공공근로로 생계를 잇던 50대 남성이 혼자 사는 집에서 숨진 지 수개월이 지나 복권 수천 장과 함께 발견됐다. 우리 사회의 비극적 단면이다. 또 청년층은 취업난에 신음하고, 고용불안의 늪은 깊어간다. 자영업자의 태반은 월수입이 100만 원에도 못 미치는 현실이다.

이런 삶의 형편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났고, 분노한 민초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더는 못 참겠다, 이게 나라냐는 공감대가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었다. 3만 명에서 출발한 촛불평화시위는 연인원 1000만 명 돌파란 역사적 기념비를 세웠다. 이제 박 대통령은 연루 수준을 넘어 비리의 몸통으로 좁혀지는 양상이다. 특검이 대통령의 뇌물죄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 여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라는 '막장 드라마'까지 펼쳐졌다. 이런 판이니 올해 대선에서 야당이 유리한 건 당연하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정권교체 전망이 80%를 웃돌 정도다.

그렇다고 속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 있다. 30년 전 1987년 6월 항쟁의 교훈이다. 요즘 돌아가는 형국이 그때와 비슷하다. 당시 6월 항쟁도 국민의 피폐한 삶을 외면하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독재세력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 성과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따냈다. 하지만 그해 대선 결과는 민주세력의 패배였다. 야권 후보 분열에 따른 '1노 3김'의 대결구도로 군부독재세력의 노태우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말았다. 노태우는 득표율 36%에 그치고도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았다. 거리에서 최루탄가스를 견디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국민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국민이 이기고 선거에서는 진 꼴이었다. 이번 대선에서도 야권의 대선주자 난립과 4당 체제 등을 볼 때 1987년의 상황이 재연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자칫 하다간 청산·심판대상인 세력이 내세운 후보가 당선될 수도 있다.

30년 전 야당이 도저히 질 수 없었던 대선에서 졌던 것은 후보 전술과 정치협상에만 매몰됐기 때문이다. 6월 항쟁 이후 분출된 국민들의 민생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대권다툼에 빠져 있다 역풍을 맞았다. 이번 촛불항쟁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헌재에서 탄핵이 결정되더라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광장 민심이 원하는 것은 탄핵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본질은 민생과 대개혁에 있다.

민주화 세력이라도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에 대한 믿음을 얻지 못하면 집권은 어렵게 된다. 민생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추진하는 게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과제다. 그와 함께 공정한 사회,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라는 게 광장 민심의 명령이다. 이를 위해 개혁입법과 그동안의 적폐를 철저하게 청산하는 작업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

물론 개헌이 필요하다. 그에 대한 논의를 국회 특위에서 차분히 진행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개헌을 도구로 편가름하고 대선주도권 싸움에 몰두하면, 통합·연대보다 분열의 길로 나아가면 30년 전처럼 다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지금은 민생 문제 해결과 개혁이 우선이다. 국회에서 이들 의제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키고 해결해 나가는 게 광장 민심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본다. 시민들의 힘으로 일궈낸 소중한 토대를 다시 허물어트릴 순 없는 노릇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운 법이다.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희망은 있다. '치킨런'에서 농장의 닭들이 대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덕분이다. 영화 속 닭들처럼, 정유년의 대한민국도 새로운 리더십과 함께 힘차게 날아오르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구시영 편집국 선임기자 겸 (사)걷고싶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