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나라 재상인 맹상군의 식객 중 풍환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맹상군이 영지인 설땅에 가서 이자와 원금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풍환은 가난한 사람들의 빚 장부를 불태워 버리고 맹상군의 뜻이라고 밝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맹상군에게 '돈을 받아 의(義)를 사왔다'고 말했다. 이른바 교토삼혈(狡兎三穴)의 고사다.

이야기는 각색의 흔적이 역력하다. 일개 식객이 주군의 재산을 불살라 버린다? 이자와 원금은 당장의 이익이고, 덕을 베풂은 미래의 이익일 뿐이다. 그렇긴 한데, 교훈은 있다. 이른바 재물을 저장하는 법이다. 재물을 숨기는 법이라…. 작은 재물이라면 몸에, 약간의 재물이라면 자식의 교육에 투자하면 합당하다. 엄청 큰 재물이라면? 궤짝에 넣으면 도둑이 걱정되고, 집에 두면 불날까 우려된다. 땅에 묻으면 썩기 쉽다. 가장 훌륭한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묻는 것이다.

3대가 장군이면 반드시 전쟁에서 패한다. 3대가 부자면 반드시 망한다. 왜 그런가. 일단 3대가 모두 기량이 출중하고 지혜롭긴 어렵다. 100년 기업, 100년 영화가 희귀한 건 이 때문이다. 재물을 한 사람에게 맡기면 반드시 망한다. 최순실 사태가 그런 것이다. 열 사람에게 맡기면 반드시 훼손된다. 만 사람이라면 어떨까. 덕과 지혜라는 보답으로 되돌아 온다.

발렌베리라고, 스웨덴 그룹이 있다. 2003년쯤 이건희 회장이 방문해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삼성의 롤 모델인 발렌베리는 어떤 회사인가. 잘 모르겠다면 사브, 에릭슨을 떠올리면 되겠다. 주업은 금융으로 SEB은행의 자산 3445억 달러는 나머지 계열사보다 많다. 1차 대전 때 폭격기를 만든 회사라면 기술력이 쉽게 이해가 가는가. 기업의 경제적 비중이 삼성과 유사하다. 160년 기업으로 5대에 걸쳐 경영권을 세습하고 있다.

발렌베리가 존경받는 기업이 된 것은 2대부터다. 창업주 앙드레는 21명의 자녀 중 혼외 자식인 크누트를 후계자로 정했다. 크누트는 아들이 아닌 두 조카 야곱과 마커스를 선택했다. 세습은 세습인데 위대한 세습이다. 크누트는 3조5000억 원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해 기초 과학 발전에 투자했다. 야곱과 마커스도 그를 본받았다. 굴지의 기업이지만 가문의 재산이래야 몇 백억 원에 불과하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모토다.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농업국가 스웨덴을 최고의 산업국가로 끌어올린 힘이다. '경영하되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 방식이다. 그룹 수익금의 대부분이 재단으로 들어가 사회에 환원된다. 재단이 지주회사 인베스트와 계열사의 주식을 보유한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삼성과는 차이가 크다. 경영권 세습은 늘 사회 문제가 된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는 20년이 걸렸다. 시작은 1990년대 중반 아버지로부터 받은 61억 원. 이걸 종잣돈으로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헐값에 48억 원어치를 사들였다. 나머지 계열사들이 매입을 포기해 단숨에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삼성의 일감을 끌어모으고 삼성생명의 상장으로 에버랜드는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이후 4800억 원으로 확보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지분이 6조6000억 원이 됐단다. 2년 전 제일모직으로, 지난해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합병해 삼성물산으로 이름을 또 바꿨다. 에버랜드~제일모직~삼성물산으로 변신하는 숨가쁜 과정은 그야말로 마술이다.

문제는 인위적인 합병 비율 조정이나 삼성물산 주가 낮추기만이 아니다. 국민연금의 합병찬성과 거액 손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구속만도 아니다. 대통령의 역할, 제3자 뇌물 혐의 여부가 끝이 아니다. 20년 동안 진행돼온 경영권 승계와 부의 이동, 그것이 핵심 중의 핵심이다.

분노를 감동으로 바꿀 방법은 없는가. 당연히 있다. 이건희 회장의 전 재산으로 재단을 만들면 기업 혁명이 이뤄진다. 뱅크런, 보쉬 스캔들로 위기에 처한 발렌베리 그룹을 구한 건 세상 사람들에 재물을 묻은 덕이다. 수만 명의 유태인을 구하고 재산을 내놓아 사회 공헌에 주력했다. 그것이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긴 하겠는가. 그렇긴 한데, 결단을 내리면 못할 바는 아니다. 새것을 얻으려면 옛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재단으로 그룹을 지배하면 우선 경영권 확보가 쉬워진다. 재단 수익금을 기초과학에 쓰면 모든 게 달라진다. 삼성이, 기업이, 대한민국이 바뀐다. 이재용 부회장이 그 뒤를 따르면 금상첨화다.

'존경받는 부자'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들 새해이니 한 번쯤 기대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부의 공정한 분배를 잘못한 게 오늘날 혼란의 근원이다. 하니, 빈부격차의 심화는 최악의 과오요, 가장 악질적인 죄다. 경제 민주화? 재벌 해체? 모두가 좋다. 하나, 또 다른 갈등과 혼란을 야기한다. 자발적 변화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삼성의 결단은 그래서 더 긴요하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